공주 우금치 마루의 비극… 그들의 후손은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비교할 수 없는 무기의 차이로 인한 어쩔 수 없는 결과였다.
당시 동학군의 무기는 죽창이고 일부 화승총과 관군으로부터 빼앗은 신식 총이 있었지만 총알이 없는 총은 무용지물이고 화승총 역시 비가 오면 소용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마침 우금치 전투가 벌어지는 내내 비가 퍼부었다고 한다.
■2차 동학혁명의 발발과 일본군의 진압작전
갑오년 1월10일 전라도 고부에서 터진 동학군의 함성이 3월과 4월을 거치면서 호남 전 지역을 장악하자 이에 당황한 조정은 스스로의 힘으로 이들을 무마하고 일상으로의 복귀를 꾀할 능력이 없었다.
특히 권력을 장악한 민비세력은 그나마 대원군 시대에 모아두었던 국고를 탕진하기에 바빴고 그 뒷감당을 위해서 매관매직을 일삼고 있었던 무능하기 짝이 없던 정부였다. 그래서 그들은 동학군들의 염원을 들어볼 생각보다는 그저 안이하게 외국의 무력을 이용해 그들을 진압할 궁리만 하고 있었다.
급기야 조정은 청나라에 지원을 요청했고 청군이 도달하기도 전에 일본은 기다렸다는 듯이 지난 갑신정변 이후 맺은 천진조약을 들어서 자신들의 군대도 파견했다. 천진조약에는 양국 중 어느 일방이 조선에 출병을 하면은 상대방 국가도 군대를 파견한다는 조항이 있었다.
9월 달 추수가 끝난 뒤 전봉준은 삼례에서 다시 거병했다. 이때의 명분은 명확히 척양척왜의 반외세였다. 그리고 전봉준은 다시 동학 교주 해월 최시형에게 자신들의 거병의 명분을 설명하며 허락해 줄 것을 요청했다. 1차 동학혁명이 발발 했을 때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며 만류했던 해월은 장고 끝에 허락하고 전국의 전 동학도들의 총동원령을 내렸다. 그 날이 음력 9월18일이었다.
당시 일본이 보유한 7개 사단 중 청일전쟁에 5개 사단 이상이 참여했다. 인부까지 포함하면 무려 24만명이 동원되었다. 포병과 공병대 등으로 편성된 사단의 전투력은 막강했고 위생부대와 병참부대까지 있는 최정예 부대였다. 그중 2개 대대가 경북궁을 점령했다.
동학군을 진압하는데 동원된 부대는 대략 2천300여명 정도로 후비보병 제19대대의 3개 중대, 제18대대의 1개 중대, 후비보병 제6연대 제 6중대의 1개 중대, 4중대와 7중대의 일부 병력, 부산수비대의 1개 중대 그리고 해군 병력 등이다. 이중에서 실질적인 동학군 진압에 동원된 주부대원은 후비보병 제 19대대의 약 800여명(1개 중대 221명, 본부요원과 지원부대 포함)이다.
■후비보병부대의 활동
동학군 진압에 동원된 후비보병 제19대대의 3개 중대는 용산을 출발하기에 앞서서 다섯 가지의 훈령을 받았다.
첫째 동학군의 근거지를 찾아서 소멸시킬 것, 둘째 동학군을 격파하고 그 화근을 잘라내서 재기를 막을 것, 셋째 조선 경군은 일본군의 지휘를 받을 것, 넷째, 1중대는 서로(수원-천안-공주-전주), 2중대는 중로(용인-죽전-청주-성주), 3중대는 동로(가흥-충주-문경-낙동-대구)로 행진할 것, 다섯째, 동학군을 동북쪽에서 서북쪽으로 내몰아 러시아의 국경을 넘지 못하게 할 것이 그것이었다. 특히 동학군이 러시아 지역으로 넘어가 국제문제화 되거나 장기화하는 것은 어떻게든 막아야 했다.
동학군을 진합하기 위해 3개 중대로 나누어서 남하하는 후비보병 제19대대 앞에는 거칠 것이 없었다. 서울에서 충청도로 가는 길목인 경기도 지역의 피해가 클 수밖에 없었다. 수원, 화성, 용인, 평택, 죽전 등 이곳에 살고 있던 혁명에 참여하지 않은 동학도들도 후에 가담할 것을 우려해 색출되어 죽임을 당했다. 충청도 지역으로 넘어가면서 본격적인 전투가 전개되었다. 괴산과 태안, 홍성, 청주전투 등이었다.
당시 동학군의 무기는 죽창이고 일부 화승총과 관군으로부터 빼앗은 신식 총이 있었지만 총알이 없는 총은 무용지물이고 화승총 역시 비가 오면 소용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마침 우금치 전투가 벌어지는 내내 비가 퍼부었다고 한다.
그에 비해 일본군의 무기는 스나이더 소총이었다. 스나이더총은 최대 사정거리 1150m, 유효거리 900m. 동학농민군은 멀리서 쏘는 총을 맞아 쓰러졌고, 한 사람이 쓰러지면 도피하기에 급급했다. 그러면 일본군이 뒤쫓아 가서 쏘아죽이거나 체포해서 처형했다.
전봉준은 공초에서 “2차 접전 후 1만여 군병을 점고한즉 불과 3천여명이요, 또 두 차례 더 싸운 뒤 점고한즉 500여명”이었다고 했다. 장위영 지휘관 이두황은 논산에서 시신이 “눈에 걸리고 발에 차인다”고 했다. 참혹한 패배였다.
일본 치바대학의 조경달 교수는 “당시 후비보병이 사용한 탄약은 1만9천173발, 조선군은 교도중대만으로 2만5천273발로 전체 희생자는 3만명을 충분히 초과할 것은 확실하며, 의료(치료) 미숙으로 상당히 많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부상 후 사망자 수를 더하면 5만명에 가까운 숫자로 추정되고 있다”면서 전국적으로 이같은 방식으로 희생된 숫자는 30~40만 명이라는 천도교측의 주장에 동의하고 있다.
이에 비하여 일본군 측의 피해는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진압군 전체에서 일본군의 전사자는 2명이고 부상과 병 등으로 사망한 자가 41명에 불과했다.
■후비보병을 찾아서
지난 주 18일부터 4박5일 일정으로 일본 시코쿠의 에이메현(縣)을 다녀왔다. 후비보병 제19대대는 대부분 이 지역 출신들이었다. 120년 전 이 지역은 어떠했을까, 그리고 동원된 사람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일까, 후손들은 자신들의 조상이 저지른 악행을 알고나 있을까. 여러 궁금증을 가지고 갔다.
우리를 초청한 일본 코리아·에이메 지부는 현 아베총리의 집단자위권을 허용하는 헌법개정에 강력히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하며 무엇보다도 한일간의 우호친선을 도모하는 시민단체였다.
예상대로 후비보병의 참전군인들의 후손들은 자신의 조상이 120년 전에 한국에서 행한 일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조상들이 그저 청일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오히려 그들은 가장의 참전통보로 인하여 가장파탄은 물론 생활고로 갖은 고생을 다 했다고 한다. 일본 정부에서는 청일전쟁 참여군인들에게 은사금을 주었다고 선전했지만 그런 것을 받은 적은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방문한 2가족 모두 한국 땅에서 병사한 후비보병의 후손들이었다. 가난한 농사꾼들이었고 모두 현역병으로 7년을 마쳤음에도 또 다시 5년 기한의 후비병으로 출병해야 했다. 그들 참전 군인들은 30대의 가장으로 어린 자식들과 농사일을 팽개치고 떠나야 했고 죽어서도 시신은 고사하고 한줌의 머리카락만 돌아올 수 있었다.
지금도 납골 무덤에는 머리카락만 들어 있다고 한다. 후손들은 조상들이 어떻게, 왜 죽었는지도 모르는 오늘의 현실을 생각하니 이들 역시 또 다른 국가폭력의 피해자들이라는 생각에 이르자 오히려 이들에 연민의 정이 생겼다면 지나친 감상일까.
이제 120년이 지난 오늘 한일 간의 갈등과 불화는 언제까지 지속되어야 할까. 지금도 정부 간의 갈등은 심화되고 있지만 동북아 평화를 위해서는 반드시 지양되어야 한다. 일본 내의 극우파들이 있지만 에이메 코리아 사람들 같은 양심적 지식인들도 존재하고 있다. 어쩌면 이들과의 유대 강화가 이 갈등을 극복하는 작은 방편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그래서인가 금번 동학혁명 120주년 행사장에 이들을 초청했다. 특히 진압군의 후손들에게 꼭 방한해서 그날 동학군의 유족들과 손 한번 잡아 보시라고 권했다. 우리라도 작은 역사의 화해를 이루어 함께 밝은 미래로 나아가자고 했다. 정말로 작은 결실이 이루어진다면 금년의 동학혁명 기념식은 더욱 뜻 깊을 것이기 때문이다.
임형진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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