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진 박해 속에도 성장한 천주교… 100여년간 순교자 1만명

한국 천주교 박해·순교의 역사
1866년 병인박해 국내 최대규모 신도 8천명 죽음으로 신앙지켜

한국 천주교의 역사는 한마디로 ‘자발적 태동’과 ‘순교의 역사’로 정리할 수 있다.

1784년 교회가 세워진 지 얼마 안 돼 신자 수는 1천 명에 달하게 됐다. 교회가 비약적으로 성장하자 집권층은 천주교를 반왕조적 종교로 규정하고 탄압했다.

박해는 한국교회가 창설된 지 1년 만인 1785년 3월부터 시작됐다. 1801년의 신유박해, 1839년의 기해박해, 1846년의 병오박해, 1866년의 병인박해가 진행됐다. 또 비교적 규모가 작았던 신해(1791), 을묘(1795), 을해(1815), 정해(1827), 경신(1860) 박해와 1901년 제주교난 등 잇단 수난으로 교회가 창설된 뒤 100여 년 동안 1만 명이 순교했다.

역사적 의미를 갖는 천주교도 박해 사건으로는 정조 15년에 발생한 신해박해(1791)가 있다. 전라도 진산의 양반 교인이던 윤지충이 모친상에서 신주를 모시지 않고 제사를 드리지 않은 채 천주교 의식을 따른 일로 처형된 사건이다. 이는 유교와 천주교가 조상제사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밝힌 시발점이 됐다.

정조 사후 순조가 즉위하자 대대적인 천주교도 숙청이 시작된다. 이른바 신유박해(1801)다. 이 때에 최초의 외국인 성직자인 주문모 신부가 죽임을 당했고, 천주교 사상 개척의 1인자로 손꼽히는 권철신이 심한 고문을 받다 옥중에서 숨을 거두는 등 300여명이 순교했다.

그러다 1839년(헌종 5년) 제2차 천주교 박해로 불리우는 기해박해가 발생했다. 이는 천주교에 우호적이었던 안동김씨을 몰아내 정치적 이익을 차지하기 위한 성격이 강하다. 당시 전국적으로 박해의 광풍이 몰아쳐 3인의 서양인 천주교 신부를 비롯한 119명의 천주교인이 투옥·처형됐다.

1866년(고종 3년)에는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천주교 탄압이었던 병인박해가 있었다. 4년간 지속된 박해는 8천명에 달하는 신도의 목숨을 앗아갔다. 이처럼 당대 천주교인들은 무자비한 탄압 속에서도 죽음까지 불사하며 한국 천주교회의 씨앗을 심었다.

박성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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