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종교] 21세기 정조의 꿈

용주사의 조실로 모시고 있는 전강 대선사께서는 법문 중에 “우리 인간은 전부가 이별뿐이다”고 말씀하셨다.

모든 인간관계는 이별을 전제로 만나게 된다. 명예와 재산과 인간의 오욕도 역시 언젠가는 우리로 부터 떠나고 만다. 그러한 것을 우리는 ‘무상’이라고 한다. 우리는 무상 속에서 몸을 받아서 태어나고 무상을 살고 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에게 ‘생사를 해탈하는 법’, ‘참 나를 찾는 법’을 설해 주셨다.

이런 진리의 법을 설해 주시지 않았다면 우리의 삶은 무상 속에 살다가 완전히 무상하게 마치게 될 것이다. 다행히 우리 불자들은 숙세(宿世)의 인연과 공덕이 있어서 금생에 이렇게 진리의 해탈법을 만나 영원한 행복과 해탈의 길을 갈 수가 있는 것이다.

전에 나는 융건릉 앞, 독산성에 있는 도량에서 몇 년간 수행 정진한 인연이 있었다. 독산성은 사도세자가 유숙했던 곳이기에 정조에게도 매우 의미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사도세자와 정조를 함께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곤 했다.

사도세자는 1760년 온양행차시에 수원부 읍치에 이르러 읍치의 객사에서 머물지 않고 임진왜란 당시의 승전지인 독산성 운주당에서 유숙하였다. 왜 그랬을까? 사도세자는 자주적 국방강화와 북벌을 주장했던 효종을 존숭하였고 효종처럼 군복을 즐겨 입고 다녔다.

독산성은 외세에 대한 자주적인 의미가 깃들어 있는 곳이며 세마작전으로 왜군을 물리친 곳이기에 유숙하게 된 것이다. 사도세자는 효종이 사용하던 청룡도를 자유롭게 쏠 정도로 뛰어난 무예실력이 있었다. 그래서 세자 책봉 시에는 “세자가 효종을 닮았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인연의 일은 참으로 묘하다. 풍수의 대가이기도 했던 고산 윤선도가 화산에 효종의 릉을 모시려 했다가 뜻을 이루지 못했는데, 후에 사도세자가 효종을 모시려던 그 자리에 있게 된 것이다. 영조는 대리청정을 통해 세자에게 제왕학을 제대로 교육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영조의 의도는 실패했고 관심은 세손인 정조에게로 향하였다. 다행스럽게도 정조는 할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여 훌륭한 국왕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영조는 “세손만이 삼백년 사직의 희망”이라고 칭찬하였고 온갖 정성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조선 제일의 개혁군주와 효의 군주가 되었다. 할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을 키워 백성을 사랑하였으며 모든 이들을 품어 안고 공정한 사회로 나가려 했던 포부가 큰 군주였다. 정조는 맹자의 사상도 깊이 받아들였다.

맹자는 ‘공손추’장에서 “공자의 제자 자로는 타인이 미처 생각지도 못한 잘 못을 타일러 주면 너무도 기뻐하였다. 하나라를 개창한 우임금은 남에게서 선한 말을 들으면 그 사람에게 엎드려 절하여 고마움을 표시하였다. 그런데 순임금은 이들보다도 더 훌륭한 덕성을 가지고 있었다.

좋은 일이 있으면 그것을 자기 혼자 실천하는데 그치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 같이 실천하였다. 타인이 나보다 더 훌륭하다고 생각되면 그 훌륭한 점을 사심없이 따랐으며 타인의 훌륭함을 나의 훌륭함으로 만드는 것을 인생의 가장 고귀한 즐거움으로 삼았다.”고 말했다. 맹자의 뜻은 참으로 웅장하고 진실하다고 하겠다. 또한 소박하고 크게 열린 마음이다.

우리 부처님은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을 부처님 성품의 생명으로 본성의 가치를 존중한다. 일체의 생명에 무한의 존중과 화해를 이루며, 그리고 우리에게 현상 속의 주인인 영원한 실상 생명을 바르게 깨달아 성불하라고 설하신다. 우리나라의 각 분야의 모든 지도자들은 이런 가르침을 본받아 국민 모두를 스스로와 똑 같이 아끼고 사랑하고 존중하기를 바란다. 이것이 21세기 정조의 꿈을 이루는 것이 될 것이다.

인해 스님 진불선원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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