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이 사라진 땅, 지독한 운명들의 이야기

이은선 첫 소설집 ‘발치카 NO. 9’ 
우즈베키스탄의 마을 배경으로 상징적 압축미ㆍ생생한 묘사 뛰어나

‘까롭까’, ‘톨큰’, ‘발치카’….

작가 이은선(32)의 소설제목들이다. 제목이 특이할뿐 아니라 이은선의 소설에는 우리 소설사에서 보기 드문 공간이 등장한다. 작가의 이력을 깊게 들여다보면 그 이유를 알게 된다.

작가는 소설가가 되기 전에 한국국제협력단(KOICA) 단원의 자격으로 우즈베키스탄의 세계언어대학에서 한국어 강사를 지낸 시기가 그중 하나다. 그래서 이은선의 작품 제목들에는 이채로운 단어들이 등장한다. ‘까롭까(상자)’, ‘톨큰(판도라)’, ‘발치카(러시아 맥주 대표브랜드)’가 그러하다.

이는 두말할 것 없이 작가의 당시 견문이 빚어낸 제목이다. 소설의 배경도 물론 우즈베키스탄의 어느 마을들인데 채도 높은 색상과 피부에 와닿는 온도 등으로 생생하게 묘사된다. 중앙아시아의 낙후된 곳이나 눈사태와 크레바스의 위험을 안고 사는 고산지대 혹은 쇠락의 길을 걷고 있는 커피 재배지가 등장한다.

이처럼 이은선의 소설들은 한국 소설이 끊임없이 영토를 확장해나가고 있다는 징후로 볼 수 있으며 나아가 그 성취에 있어서도 이 신예 작가의 기여는 크다.

이은선의 첫 소설집 ‘발치카 No. 9’(문학과지성사刊)이 더 반가운 이유다. 201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붉은 코끼리’를 통해 ‘뛰어난 상징적 압축미’를 보여주며 등단한 이은선이 그간 꾸준히 발표한 작품 10편을 모았다.

소설집 앞쪽에 연달아 배치된 ‘카펫’, ‘까롭까’, ‘톨큰’은 ‘수로(水路)’ 3부작에 해당하는데 부제가 말하듯 물이 작품의 중심핵을 이룬다.

우즈베키스탄 북쪽과 카자흐스탄 남쪽이 만나는 접경지대에 위치한 아랄 해는 한때 세계 4대 호수라 일컬어지는 내해였다. 그러나 1960년대부터 사람들이 면화 재배를 위해 아랄 해로 유입되는 강물들을 중간에서 끊어 관개용수로 사용하는 바람에 이 풍족한 바다는 현재 70% 이상 사라지고 말았다.

목화산업과 정치와 군의 결탁은 아랄 해를 둘러싼 생명들이 말살되는 것을 빤히 보면서도 방치했다.

물이 사라진 땅은 메마르고 염도마저 높아 작물이 자라지 않고 인근 주민들은 물 부족과 빈혈, 폐질환, 갑상선 질환 등 각종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 ‘카펫’의 어린 화자 ‘슈흐랏’이나 ‘샤흐노자’는 얼굴이 붓고 눈이 튀어나오는 병에 걸려 있는데 이는 갑상선항진증의 증상이며 ‘바세도우씨 병’이라고도 한다.

‘까롭까’의 대령은 한 지역의 독재자인데 이곳의 재화와 노동력, 그리고 젊은 여자들은 모두 대령의 소유다. ‘톨큰’은 이제 막 관개 사업이 시작되려는 마을에서 군인과 주민들이 대치하는 상황을 그리고 있다.

독자는 이 세 편을 통해 한 세계가 폐허로 변해가는 과정을 역순으로 읽게 되는데, 완벽하게 황폐해질 때까지 단 한 번도 제대로 바깥으로 내질러지지 못한 구조요청들을 곳곳에서 확인하며 가슴이 무겁게 내려앉는 경험을 할 것이다. 값 1만3천원

강현숙기자 mom1209@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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