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살 때부터 작곡을 시작해서 35년의 짧은 일생동안 방대한 양의 아름다운 작품을 남긴 모차르트가 이 세상에서 가장 축복받은 음악적 재능을 타고났던 천재 음악가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만 그의 음악이 오늘날에도 왜 이토록 가깝게 우리의 삶에 다가오는지에 대한 이유를 탐구해볼 필요는 있다.
모차르트의 음악은 그의 선배들이 이루어낸 서양음악의 근간, 즉 바흐가 완성한 대위법이나, 헨델이 확장시킨 화성법, 그리고 하이든이 집대성한 소나타 형식 등 오늘날까지도 사용되고 있는 악곡 구성의 틀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모차르트는 이러한 기존의 틀을 개혁적으로 바꾸려 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 틀 안에서 자신만의 음악 언어를 찾아 독창적인 창작 활동을 펼쳐 나감으로써 순백의 아름다운 음악의 궁극적 이상향을 제시했다. 이러한 모차르트의 창작성향은 일면 내성적인 그의 성격과 삶의 태도와 연결되어 있다.
16C말 르네상스를 기점으로, 혈통귀족 지배계층에 대한 서민들의 불만과 욕망이 분출되면서, 부를 쌓은 신흥 상인계층의 신분상승을 위한 사회적 심리적 수단으로서 오페라가 탄생하고 발전해 왔다. 모차르트가 태어나 활동했던 35년간(1756~1791)의 기간 또한 그러한 유럽 계급사회의 전통이 여전히 지배했던 시기였다.
그러나 몰락하는 귀족계급과 부상하는 시민계급 간의 투쟁으로 인한 역동적 갈등이 사회적으로 표출되기 시작하면서, 혁명과 계급충돌의 전운이 전 유럽을 감싸고 있었고, 18C 후반에 터진 프랑스혁명과 영국 산업혁명의 씨앗이 태동하고 있었던 격동의 시기 한가운데에 모차르트의 삶이 놓여 있었다.
이 시대의 예술가들이 사회적 사건들에 의해 직접적으로 영감을 얻고 또 거기에 직접 관계했던 것처럼, 모차르트도 사망하기 전 해인 1790년, 프랑스혁명이 터진 이듬해에 정치적인 프리메이슨 운동을 위한 선전용 오페라 ‘마술피리’를 만들었다.
시민계층으로 태어난 모차르트는 궁정음악가로 근무하며, 자신의 음악적 재능의 주된 소비자가 궁정의 귀족계층임을 잘 누구보다 잘 알았지만, 개인의 품위와 음악활동을 위해 놀랄만한 용기로 자신의 귀족 고용주와 위임자를 상대로 저항운동을 벌였다. 당연하게도 궁정에서 일하던 시민계급 출신자의 운명은 실패로 돌아갔다.
독일의 사회학자 노베르트 엘리아스는 모차르트의 비극이 그의 음악적 환상과 음악적 양심이 아직 그 사회의 전통적 취향에 묶여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나 창조적 작업에 있어서 순전히 혼자의 힘으로 사회 권력구조의 벽을 부수려 했다는데 있다고 말했다.
신이 내린 음악적 재능이 있었으나 볼품없는 외모의 소시민이었던 모차르트는, 자신의 음악적 세계와 인격보다는 경제적 재능과 사회적 성공에 관심이 더 많았던 부인 콘스탄체, 그리고 너무나 자주 천박한 음악으로 변덕을 부렸던 빈의 청중들로부터 지속적인 사랑을 받지 못했다.
당연히도 그는 사회적 실존감을 잃고 체념하여 혼자만의 고독한 싸움을 포기하고 스스로 추락했다. 그리고 1791년 12월 6일, 쓸쓸히 죽어갔고 ‘빈민’ 묘에 매장되었다. 이번 가을엔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으러 혼자서 콘서트홀을 찾아야겠다.
임형균 톤마이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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