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현 시인은 ‘너에게 묻는다’라는 시에서 그랬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고. 안 시인은 ‘연탄 한 장’이란 시에선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이라고도 했다. 내 자신을 성찰해 보게 되는, 공감 가는 시다.
자신의 몸을 불태워 누군가의 겨울밤을 따뜻하게 지켜주던 연탄, 생각해보니 꽤 고마운 존재였다. 다 타고 난 하얀 재는 눈 많이 내린 후에 길에 뿌려져 미끄럽지 않게 했었다.
예전엔 겨울철 김장만큼이나 월동준비로 연탄을 쌓아두는 게 중요했다. 살림이 넉넉한 사람들은 한 겨울을 날 수 있을 만큼 창고에 가득 쌓아놓고 땔 수 있었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돈이 생기는 대로 한 두 장씩 사다 쓸 수밖에 없었다. 도시의 저녁 무렵, 새끼줄에 연탄 한 두장 꿰어들고 골목길을 오르는 가장의 등굽은 뒷모습은 가슴 한 켠을 아리게 했다.
연탄이 우리나라에 등장한 것은 1920년대 일본인이 평양공업소를 세우면서다. 국내 자본으로 세운 연탄공장은 대성그룹 고 김수근 회장이 1947년 대구에 세운 대성산업공사가 처음이다. 초기엔 조개탄 주먹탄 형태였으나 열량을 높이기 위해 구멍을 뚫어 구멍 수에 따라 구공탄 십구공탄 이십이공탄이 나왔다. 1965년 삼천리연탄기업사가 22공탄을 생산하면서 표준화가 됐다.
1960년대는 연탄산업의 전성기였다. 1963년 말 국내 연탄공장은 400여 개에 달했다. ‘국민연료’ 연탄은 1988년 이후 석유, 가스에 밀려 서서히 자취를 감췄다. 기름보일러가 보급되고 도시가스 같은 청정연료를 쓰면서 석탄 소비가 급격히 줄어 도시의 연탄공장은 변두리도 밀려나거나 문을 닫았다. 달동네에 공급되거나 비닐온실 난방용으로 명맥을 유지했을 정도다.
하지만 최근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연탄 소비가 다시 늘고 있다. 기름보일러를 연탄보일러로 바꾸는 집도 늘었다. 때마침 불어온 복고바람 덕인지 거리에서 연탄구이집을 보는 것도 어렵지 않다. 그러고 보면 연탄의 시대는 막을 내렸을지 몰라도 연탄으로 상징되던 고난의 시대는 계속되고 있는 것 같다.
어려운 이들에게 연탄배달 봉사를 하는 연탄은행에 기부가 줄었다고 한다. 영세민이나 차상위계층에게 연탄은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날 수 있는 유일한 난방수단이다. 연탄 한장의 기부가 절실한 연말이다.
이연섭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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