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종교] 사랑의 마음으로

어느 날 밤, 한 남자가 목사님을 찾아와서 말했다. “목사님 제 이웃에는 아이들이 여덟 명이나 되는 가정이 있습니다.

그들은 너무 가난하여서 벌써 여러 날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습니다” 목사님이 그 남자와 함께 그 집을 찾아갔을 때, 아이들은 오랜 영양실조로 얼굴에 뼈만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얼굴에는 슬픔이나 불행 같은 표정은 없었다. 단지 배고픔의 깊은 고통만이 있을 뿐이었다.

목사님은 그 집 어머니에게 쌀을 건네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쌀을 두 몫으로 나누더니 절반을 들고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그녀가 다시 돌아왔을 때 목사님께서 물었다. “어딜 갔다 오셨습니까?” 그녀는 “이웃집에요. 그 집도 배가 고프거든요”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목사님은 그녀가 쌀을 나누어 준 것에 대하여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가난한 사람은 실제로 더 많이 나눌 줄 아니까. 하지만 목사님이 놀란 것은 그녀가 이웃집이 배가 고프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대개 사람은 자신이 고통을 받고 있을 때는 자신의 고통만을 생각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대해서는 마음을 쓸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보통의 사람들은 자신의 아픔은 처절하게 기억하고 느끼지만, 다른 사람의 아픔과 고통은 무관심하기 마련이다. 혹은 말하기를, “나의 아픔이 너무 고통스럽기에 다른 사람들의 아픔에 관심 가질 여유가 없다”고도 말한다.

정말 그럴까? 나의 고통은 모두가 함께 느끼고 공유하기를 바라면서도, 다른 사람의 고통은 무관심한 이기적인 사고와 삶의 방법 때문이 아닐까?

요사이 삶이 참 퍽퍽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세계적인 불황으로 인한 경제적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 수많은 사건과 사고로 가슴 아프고 고통당하는 사람들, 또는 가정의 평화가 망가져 신음하는 사람들! 때문에 매체들의 소식의 서두는 경제적, 가정적, 사회적 고통받는 사람들의 사건이 우리를 놀라게 한다.

그들을 통해서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단호히 정죄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편 그 지경까지 이르게 된 것은, 어쩌면 그들의 이웃인 나와 우리의 무관심 때문은 아닌지 돌아본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세기 12:2)라는 구절이 있다. 필자는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구절이라고 생각된다.

우리는 서로에게 복이 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이 사회가, 이 나라가 살만한 세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이 내게 복이 될 것을 기대하기 이전에, 내가 나를 사람의 복이 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당신 때문에 행복합니다!” 이런 말들이 곳곳에서 들리는 사회를 만들어보자. 누군가가 나 때문에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보자. 나 역시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내게 있는 작은 행복이라도 두 몫으로 가르고, 그것조차 가지지 못한 이웃에게 나누어보자. 내 일에 대한 나의 욕심 때문에 움켜쥐었던 주먹을 펼쳐, 오늘을 이웃과 함께 서로 웃으며 살아보자.

지금 우리의 삶은 어떤 향기를 갖고 있는가? 분노와 노여움은 우리를 향기롭게 하지 못한다. 이제 분노와 노여움을 접고, 맑은 사랑만으로 다시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진정 마음의 행복을 느끼는 날을 맞이할 것이다.

이길용 이천 새무리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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