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종교] 봉황리 마애불의 침묵

얼마 전 한신대의 한 교수님으로부터 교직원에 대한 도올선생의 특강에 참석해 달라는 청이 있어 참석하였다. 도올선생은 지난 일년동안 연변에 있는 대학에서 <노자> 를 강의 했는데 좋은 호응이 있었다고 한다.

한신대에서 선생은 고구려의 역사, 유적, 그리고 그 기상과 중국과의 관계 등에 관해 열정적으로 강의하였다. 나는 점심공양을 함께 하면서 고구려의 도읍지, 광개토대왕비, 연변지역의 풍토와 농산물, 고구려의 세계관, 신채호 선생 등에 대해 많은 담론을 나누었다.

나는 항상 우리 민족의 남다른 강한 정신력 속에 고구려 기상의 DNA가 숨어 있음을 느껴왔다. 도올선생은 그것을 우리민족 특유의 <깡다구> 라고 표현하였다. 우리에게는 5천년을 이어온 모진 생명력과 결코 그냥 물러설 수만은 없는 그 무엇이 있지 않은가?

나는 뜻을 함께 하는 분들과 고구려의 유적을 살펴보고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봉황리 마애불을 참배하기 위해 삼국문화융합지역인 충주로 향했다. 이 마애불은 불교가 고구려에서 남한강을 따라 신라로 전파되는 경로를 보여주며, 600년경에 조성되었다.

이 마애불상군은 조성시기를 약간 달리하여 두 군데에 나뉘어 있는데 첫 번째 8분이 모셔져 있는 마애불상군 중에 팽이모양의 대좌나 갸름한 얼굴의 상호는 고구려 양식의 특색을 보여준다.

조금 위쪽에 있는 두 번째의 큰 마애불은 머리 위의 두광안에 5분의 아주 작고 천진한 부처님들이 함께 모셔져 있다. 법화경에 부처님께서 법을 설하실 때 타방세계의 부처님들이 화현하셔서 증명하고 찬탄하시는 모습이 나오는데, 마치 그 모습을 보는 듯하여 새로운 감동을 받는다.

이 큰 마애불의 얼굴은 사각형에 가깝고 표정은 수수하며 미소를 띠지 않고 묵연한 침묵을 머금은 상호이다. 왜 천년이 넘도록 이렇게 굳게 입을 닫고 계실까? 나는 이 마애불의 오래된 침묵에서 깊은 전율과 웅변을 느낀다.

그리고 이 땅의 불자들의 간절했던 마음과 정성을 되새겨보고 스스로를 돌아보며 지금의 종교현실을 성찰한다. 우리 불자들의 마음이 초발심의 순수한 보리심으로 가득할 때, 또한 우리 민족이 본래의 한민족 정신을 회복할 때 저 봉황리에 있는 큰 마애부처님은 그 무거운 침묵을 놓고 대 환희의 미소를 띠게 되리라!

우리 일행은 임진왜란 때 신립장군과 8천의 군사들이 순절한 탄금대를 마주하고 있는 남한강변의 창동마애불을 친견하고 중원 고구려비와 통일신라의 유일한 7층 석탑인 중앙탑도 찾아보았다.

또한 삼국시대 3대 철산지의 하나인 이 지역에는 유명한 철불이 계시는데 그 중 가장 오래된 백운암 철불(보물 제 1527호)을 특별히 친견하였다.

상호가 완벽하도록 아름답다. 특히 그 자애롭고 부드러운 눈의 모습은 우리의 생각과 말을 멎게 했다. 백운암에서 따뜻한 차 몇 잔을 머금고 나서 탄금대로 향했다. 탄금대 열두대에서 나는 깊은 사유에 들었다.

중국 길림성에 있는 광개토대왕의 북부여 수사인 모두루 묘지에는 “하백의 손자이며 일월의 아들인 추모성왕(동명성왕,고구려의 개국시조군주)이 북부여에서 태어 나셨으니, 천하사방이 이 나라가 가장 성스럽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적혀 있다.

이 글 속에는 고구려중심의 천하관이 들어있다. 이 고구려 땅은 현재 다른 나라에 속해 있지만 우리는 그 정신을 계승하고 발전시킬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근본정신을 굳건히 해야 할 것이다.

우륵이 가야금을 울렸던 노을진 남한강 탄금대에서 나는 신립장군과 하나 되어 고구려 자존의 정신을 가다듬었다. 저 돌부처님도 녹아내리도록, 그렇게 정성스럽게 기도해 왔던 이 땅의 불자들을 기리며 나는 어쩔 수 없는 뜨거운 눈물을 오래도록 머금고 있었다.

인해 스님 진불선원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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