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4월 15일 오후 화성시 향남면 제암리. ‘두렁바위’로 불리는 농촌마을에 아리타 도시오 중위가 이끄는 일본 군경이 들이닥쳤다. 4월 5일 화성주민들의 발안장날 만세운동을 강경 진압한 것을 사과하겠다며 주민 가운데 15세 이상 남자들을 제암리교회에 모이게 했다. 주민들이 모이자 일본 군경은 교회를 포위하고 창문으로 사격을 가했다.
주민들이 죽거나 부상으로 신음하자 일본군은 만행을 감추려고 교회에 불을 질렀다. 남편 생사를 알기위해 달려온 마흔 넘은 여인이 사살되고, 19세 여인은 칼에 찔려 죽었다. 군인들은 마을에 불을 지르고 떠났다. 이렇게 교회에서 죽은 사람 23명을 포함해 무고한 양민 29명이 학살 당했다.
제암리교회 학살사건 사흘 후인 4월 18일, 세브란스 의전 교수인 캐나다인 의사 스코필드 박사(한국명 석호필)가 현장을 찾았다. 제암리 소식을 접한 스코필드 박사는 “이 끔찍한 사건을 세상에 알려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제암리를 찾아 일제의 만행 흔적을 사진으로 찍었고, 주민들로부터 당시 상황을 전해들었다. 그리고 ‘제암리 학살 보고서’를 캐나다 선교본부에 제출하고, 장로회 기관지 ‘프레스비테리안 위트니스(Presbyterian Witness)’에 기고해 일본의 만행을 세계에 폭로했다.
1920년 일본의 압력으로 캐나다로 강제 출국된 스코필드 박사는 캐나다와 미국에서 일제 식민통치의 진실을 알렸다. 1959년 한국으로 영구 귀국한 그는 소외된 자와 학생들을 위한 사회봉사활동에 헌신하다 1970년 82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스코필드 박사는 3ㆍ1운동 민족대표 33인과 함께 ‘34번째’ 민족대표로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됐다. 정부는 박사의 공훈을 기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스코필드 박사의 제자이면서 그를 존경하는 사람들이 2010년 (사)호랑이스코필드기념사업회를 만들었다. ‘강한 자에는 호랑이처럼, 약한 자에는 비둘기처럼’ 살았던 그의 삶을 받들어 ‘호랑이’ 스코필드라 이름 지었다.
광복 70주년을 맞은 올해 3ㆍ1절에 제암리에 스코필드 박사의 동상이 세워졌다. 커다란 바위 위에 앉아 양손에 카메라를 들고 제암리 교회가 있던 터를 바라보는 모습이다. 95년 만에 다시 제암리에 선 스코필드 박사는 ‘한국을 조국처럼 한국인을 동포처럼’ 사랑했다. 이젠 우리가 스코필드 박사를 추모하며 그의 뜻을 기려야 할 것이다.
이연섭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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