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그냥 쉽게 오지 않는다. 꽃샘추위가 있었고 며칠 동안 봄바람이 사나웠다.
본래 종교의 진리는 영원한 것이다. 우리는 그 진리 속에 있다. 그러니 지금 이 한순간도 그 진리와 하나여야 한다. 그렇게 우리는 마음을 안으로 잡드리하여 이 본마음을 잃지 않아야 한다. 이것이 종교인의 진실성이고 참다운 기도이며 정진수행이다.
작년 7월 용주사 교구 신도회 임원들과 함께 「주어사 원형 복원 발원」을 위한 기도에 참여하기 위해 여주시 산북면 하품 2리(주어리)에 있는 주어사(走魚寺)지를 찾았다.
주어사는 출토유물로 볼 때 고려 때부터 조선 후기까지 존립한 것으로 보고 있는데, 1779년(정조3년) 성호학파의 문인이며 남인계통인 녹암 권철신을 중심으로 정약전, 이벽 등의 6인이 유학과 서학(천주교)을 강학하였던 곳이다.
권철신의 고향은 양근(양평)인데 주어사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정조대왕은 당시 열린 마음으로 서학을 받아들였고 실학 사상가들을 비호하였다.
당시 서학의 강학 장소를 제공하고 서학자들을 보호해준 주어사를 비롯한 불교계의 움직임은 정조대왕의 개혁과 포용정신에도 맞닿아있다.
그러나 참으로 안타깝게도 뜻을 다 이루지 못하고 정조대왕이 일찍 세상의 인연을 다하고 나니 노론벽파에 의한 신유박해(1801년, 순조 1년)가 일어난다.
깊은 산속 주어사와 천진암에서 강학했던 남인 시파의 서학자들은 목숨을 잃었다. 또 그들을 조정에 신고하지 않고 끝까지 보호했다하여 주어사 스님 10여 분도 함께 희생을 당하여 목숨을 잃는다.
그리고 사찰도 폐사를 맞이한다. 분명 10여 분의 스님들은 진정한 종교인의 길을 간 것이다. 정조대왕의 개혁정신과 열린 마음에 뜻을 같이 했던 스님들이었을 것이다.
1794년 청국의 주문모신부가 국내에 들어오고 천주서학이 교세확장을 이룰 수 있었던 데에는 정조대왕의 서학에 대한 관대한 정책이 중요한 계기였음이 분명하다.
20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의 현실은 어떠한가? 주어사지 안내판에는 「천주교 강학회 장소」가 중점적으로 소개되어 있고 불교의 보호아래 천주학자들이 주어사와 인근의 천진암에서 강학했다는 내용이 없다. 또한 천주학자들을 끝까지 보호하여 10여분의 스님들이 목숨까지 희생당했다는 사실도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천진암의 현실은 참으로 말할 수 없이 참담하다. 천진암 대웅전 터에 「조선 교구 설립자 선조묘」가 있으며 절 암(庵)자도 초막 암(菴 )자로 바뀌어져 있고, 스님들의 비호아래 천주강학이 여러 차례 있었다는 내용은 전혀 없다.
대저 종교적 가르침에서 은혜와 사랑이라는 의미는 무엇인가? 강학자들을 끝까지 보호하고 지원해 주며 생명까지 희생했던 그 은혜를 어떻게 대해야 온당한 것인가? 주어사지를 제2의 천진암같이 하려는 여러 가지의 움직임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는 이 시대의 종교적 일방주의, 배타주의를 용인하고는 국민의 화합과 상생을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주어사지 복원을 위한 기도를 하면서 무던히도 영원의 진리를 생각하였다.
주어사지와 천진암에 대한 분명한 역사적 사실과 지료들을 모아보고 현재 일어나고 있는 여러 움직임을 살펴보니 이런 외침이 끝없이 마음 안으로부터 솟아난다. ‘천주교 발상지 성역화 사업으로 불교의 흔적을 완전히 사라지게 한 천진암에 대한 재조명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주어사 문제에 대한 종교적 해법은 공간의 복원뿐만 아니라 역사의 사실과 가치의 복원이 중요한 문제이다. 주어사를 역사 사실 그대로 복원하여 후대의 사람들에게 종교화합의 교육의 장이 되게 하자. 이제 우리는 이 아름다운 상생의 금자탑을 세워야 하지 않겠는가!’
과연 그날이 우리에게 올 것인가?
인해 스님 진불선원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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