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슬보슬 봄비 내리는 일요일 오후, 서늘한 기운을 지우고자 따뜻한 찻잔을 데운다. 찻주전자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찻잔을 넘어 튀어 오르는 모습에서, 필자가 가지고 있는 상식 밖의 일이 벌어진다.
필자가 알고 있는 상식은 위치 에너지의 성질상 처음의 위치보다 더 높이 올라갈 수 없다는 것인데, 찻잔을 넘어 튀는 물방울은 찻주전자를 넘어 간다.
왜일까? 이리저리 생각하다 필자가 간과하고 있는 사실 하나를 발견한다. 떨어지는 물의 질량과 튀는 물방울의 질량이 다르다는 사실! 다량의 질량이 소량의 질량을 원래의 위치보다 더 높이 올릴 수 있다는 역학관계를 잊은 것이다.
세월호가 바다 속에 잠기며 수많은 젊고 어린 영혼들을 바다 속에 수장했던 끔찍한 일이 벌어진 지 벌써 1년이 지났다. 다시 생각해 보아도 몸서리칠 수밖에 없고, 두 번 다시 반복되어서는 안 될 참혹한 사건이다.
얼마 전, 잘 아는 후배 하나가 세월호 이야기를 꺼낸다. 많은 사람들이 유가족들의 아픔에 동참하며 거리로 뛰어나가 함께 울부짖고 소리치는 현장에 자신도 있었단다. 뿌듯함을 내포한 자랑스러운 어투로 이야기하며, 이 시대의 많은 무감각한 기성세대들이 함께 동참하지 않음을 개탄한다.
진실을 밝히고 아픔에 동참하는 것이 정의라고 목소리 높이며, 동참하지 않는 사람들의 비겁함과 몰인정함을 얼굴 붉히며 매도(?)한다. 필자는 그 광화문의 현장에 동참하지 않았기에 무언지 모를 의기소침함이 억누른다.
한참을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과연 나는 비겁하고 몰인정한, 그리고 사회적 관심에 별반 반응 없는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인가? 나의 아픔이 아닌 그들의 아픔이기에 점점 망각하며 살아가는 것인가? 그렇다면 시대적 사회 양심을 선언하고 실현하기 위하여 전념해야하는 목사로서 직무유기의 삶이 아닌가? 정말 아프지 않은가?
그러나 필자도 분명히 아프다. 그것도 너무 많이 아프다. 단지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소리치며 고통을 호소하는 방법이 아픔과 괴로움을 표현하는 방법이겠지만, 쏟아져 나오는 울음을 가슴에 묻으며 찢어지는 고통을 삼키는 것도 또 다른 아픔과 괴로움을 표현하는 방법이 아니겠는가?
아들 녀석이 대학교 합격통지서를 가지고 왔을 때, 필자는 조용히 한 마디만 말했다. “수고했다.” 그 옛날 필자가 대학 합격 통지서를 아버지에게 건넬 때 들었던 그대로이다. 이제야 내 아버지의 기쁨을 가늠하게 된다. 무뚝뚝하고 정감 없이 내뱉은 그 한 마디의 말에는 무한한 기쁨과 뿌듯함이 내포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세월호의 아픔을 절절히 표현을 하지 않지만, 필자의 가슴 속에는 고통과 슬픔이 내재되어 있다. 이제 다시 그 후배와 동일한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내 속에도 너희들과 다를 바 없는 고통과 슬픔이 존재한다고. 내가 가지고 있는 표현의 방법을 비겁하다고 매도하지 말아달라고.
유족들이 갈망하고 정부가 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하는 것을 보니, 세월호의 인양이 점점 가시화 되는 듯하다. 그런데 필자는 염려가 된다. 인양의 과정과 절차가 너무 힘들고 위험한 과정이란다. 그 과정과 절차 속에서 또 다른 누구의 부모와 형제, 그리고 자녀가 다른 고통과 슬픔에 노출되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이다. 너의 아픔을 위해 또 다른 누구의 아픔이 재생산된다면 바람직한 일이라고 할 수 없지 않은가?
이길용 이천 새무리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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