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평섭 칼럼] 세종大王, 채찍을 들다

세종대왕은 ‘조선실록’에 나타난 것만으로도 100가지가 되는 지병을 갖고 있었다. 한쪽 다리가 아파서 10년이나 고생을 했고, 책을 너무 많이 읽어 안질이 생겨 지금 세종시 전의면에 있는 약수터에 와서 치료를 받기도 했다. 세종대왕을 가장 괴롭힌 것 중 하나는 등창이었다. 오죽했으면 “지난 밤, 돌아눕지 못할 만큼 아프고 괴로웠다”고 했을까?

대왕은 자신이 신병을 많이 앓고 있었기 때문에 백성들의 질병 관리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심지어 감옥에 갇힌 죄수들이 아프면 특별관리를 하도록 했고, 노비의 신분이라도 여자가 임신을 하면 출산전후 휴가를 주라고 했다. 특히 노비가 길에서 아기를 낳았다는 보고를 듣고는 무척 가슴 아파했다.

‘임금인 나도 병에 걸리면 고통을 겪는데 백성들이야 어떻겠는가’ 하는 것이 늘 대왕의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세종대왕은 조선 땅에서 발생하는 모든 질병을 조사하여 959종으로 분류했고, 그것에 대해 1만7백가지의 처방을 작성케 했다. 그 당시로서는 대단한 작업이었다. 이것이 1433년 6월에 간행된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으로 ‘동의보감’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의서(醫書)로 꼽힌다.

그러나 이것은 양반 상류층에서나 보급되었고 일반 백성은 그 글이 모두 한문으로 되어 있어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전염병이 돌 때마다 방방곡곡, 방을 붙여 질병퇴치를 위한 처방을 널리 알리게 했는데 이 역시 한문으로 되어 있어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어찌하여 백성들은 그 처방에 따르지 않고 미신에 사로잡혀 굿을 하며 안타깝게 죽어가는가?”

전염병이 창궐하여 백성들이 수없이 희생되어도 한문으로 되어 있는 처방서를 이해하지 못하다니…….

‘훈민정음’, 즉 누구나 배우기 쉽고 읽기 쉬운 ‘한글’의 필요성을 세종대왕은 절실히 느꼈으리라. 그리하여 마침내 1446년, 세종 28년 ‘한글’은 빛을 보게 된다.

물론 백성을 질병으로부터 구하는 데만 한글 창제의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러저러한 목적이 결국은 백성을 사랑하고 소통하기 위한 것, 그 하나로 귀결됨은 물론이다.

그런데 세종대왕이 질병을 분류하고 처방이 담긴 의서를 보급하며 ‘한글’까지 반포한 지 500년이 넘었지만 메르스 사태에서 보듯 ‘한글’이 없던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허둥대고 학교수업을 멈추는 등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만약 지금 세종대왕이 만삭의 임산부가 메르스에 감염되었다는 뉴스를 접했다면 얼마나 혀를 찼을까? 어느 시대인데 그렇게도 무방비 상태로 임산부를 노출시키는 사회시스템인가.

평택의 한 경찰관이 사우디에서 귀국한 친구와 술을 마신 후의 행보가 너무 황당하여 의료진이 감염경로를 못찾아 쩔쩔맨 모습을 보면 또 얼마나 기막혀 했을까.

그 경찰관의 평택-서울 의료원-기차를 타고 평택-직원 승용차를 타고 보건소-자택-다시 아산 충무병원-단국대병원으로 이어지는 행보가 아프리카 후진국이나 석기시대의 모습으로 착각을 하게 한다.

오히려 우리가 은근히 의료수준을 얕잡아 보았던 중국에서는 13억이나 되는 큰 식구를 거느리고도 현재까지 단 1명의 메르스 감염자가 발생하지 않은 것에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그들은 요란을 떨지도 않고 중동에서 메르스가 발생한 순간부터 차분히 대문을 굳게 지켰다. 모든 병의 출입문, 공항과 항만을 철저히 막은 것이다.

세종대왕은 지금 이렇게 호통칠 것이다. “터진 후 호들갑 떨지 말고 처음부터 대문을 지켜라”

변평섭 전 세종시정무부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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