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평섭 칼럼] 개미고개 전투와 한국전

6·25때 최초로 투입된 미24사단의 스미스 부대는 고작 406명으로 거침없이 밀고 내려오는 3만명의 북한군을 막으려 했다.

“그들은 우리가 전선에 나타나기만 하면 도망쳐 버릴 것이다.”

6·25 종군기자로 ‘이런 전쟁’이라는 책을 쓴 퍼렌 버그는 이렇게 미군들이 북한군을 깔봤다고 했다.

그러나 7월 5일 북한군과의 첫 접전지, 오산 죽미령 전투에서 스미스 부대가 무너져 버렸고, 다시 보강해 투입된 34연대까지도 7월 6일 천안에서 퇴각을 당하는가 하면 연대장 마아틴대령마저 전사를 하고 만다. 한국전 최초의 연대장 전사였다.

잇달아 비보를 접한 24사단장 윌리엄.F.딘 소장은 북한군 탱크를 저지할 대전차포를 일본에 있는 맥아더사령부에 긴급히 요구하며 전선을 뛰어다녔다.

7월 6일, 천안이 무너지자 딘 장군은 지금의 세종시 전의면 소재 개미고개에 미군 667명으로 하여금 적의 남하를 결사 저지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한국전 가운데 한 전투에서 가장 많은 미군 전사자를 낸 ‘개미고개’의 전투가 7월 11일까지 무려 5일간이나 치열하게 전개된다. 개미고개는 차령산맥을 가로지르는 분수령이어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했다.

거기다 국도 1호선이 지나고 경부선 철도가 상하행선 나란히 긴 터널을 빠져나가고 있다. 철도가 지나는 깊은 계곡과 터널, 모두가 전략적으로 그 역할이 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곳은 지형적으로 안개가 자주 끼는데 그때도 그랬다. 미군이 터뜨리는 조명탄으로는 안갯속을 움직이는 적을 식별할 수가 없었다.

결국 5일간의 전투에서 미군은 667명중 517명이라는 엄청난 전사자를 내고 조치원으로 퇴각했으며 지금의 세종시를 에워싸고 흐르는 금강에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했으나 그마저 무너지고 포위된 대전을 탈출하던 딘 장군은 북한군에 포로가 되고 만다. 한국전 최초의 ‘미군 사단장 포로’라는 불명예를 안고 말았다.

517명의 목숨을 앗아간 개미고개-지금 그곳에는 알지도 못하는 아시아의 조그만 나라, 한국을 위해 목숨을 던진 미군들을 기념하는 작은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전투자세를 취하고 있는 3명의 미군 병사와 쓰러진 전우를 일으켜 세우고 있는 병사, 그리고 한켤레의 흙묻은 군화와 철모가 얹혀진 총검의 조형물이 있고 그런 부조물이 반원형으로 펼쳐져있어 그날의 처절했던 장면을 실감하게 된다.

그런데 이들의 희생은 헛된 것이었을까? 아니다. 한국전을 연구한 사람들은 개미고개에서 517명의 전사자를 내면서까지 5일간을 버티어낸 것이 결국 북한군의 남진계획에 차질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미24사단이 비록 패퇴했지만 대전전투에서 시간을 끌었고 그것은 다시 낙동강 전선을 구축할 시간을 벌어줬다는 것.

만약 그때 낙동강 전선이 구축되지 않았으면 부산까지도 적의 수중에 넘어갈 수 있었을 것이니 참으로 아찔하다. 세종시가 해마다 개미고개 전투가 벌어진 7월 6일, 현장에서 추념식을 갖는 것도 그런 의미가 있다.

지금의 이때쯤이면 개미고개 깊은 계곡에 피어나는 짙은 안개를 보면 이국땅에서 장렬히 산화한 517명 혼령에 저절로 숙연해진다.

변평섭 前 세종시정무부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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