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평섭 칼럼] 세종시에 ‘正二品松’ 심은 뜻은

지난 7월 16일, 세종특별자치시가 새 청사를 마련하고 개청식을 가졌다. 유유히 흐르는 금강 가까이에 물 위를 떠있는 ‘배’의 형상을 하고 있는 현대식 건물이다.

원래 이곳은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서해로부터 올라온 소금 배와 한양으로 보내는 조곡(租穀)을 실은 배들이 붐볐던 곳인데 금강의 하상이 점점 높아지면서 그런 모습이 사라져 버렸다. 이제 세종시는 원대한 미래를 향해 항해를 한다는 뜻으로 청사 건물도 배 모양으로 그렇게 설계를 한 것이다.

그런데 이날 개청식 때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보은 속리산 입구에 있는 ‘정이품송(正二品松)’의 후계목 한 그루를 참석자들 모두 흙을 한 삽씩 떠 심은 것이다.

정이품 소나무에 얽힌 이야기는 우리 국민들이 익히 알고 있다. 조선 7대 임금 세조가 속리산 법주사를 행차하다가 바로 이 소나무 가지에 세조를 태운 연이 걸리게 되었고, 세조가 한마디 하자 가지가 들려 일행이 무사히 통과했다는 것. 그래서 ‘정이품’이라는 높은 관직을 내리고…. 소나무 가지가 들릴 만큼 세조의 왕권이 강력한 힘을 발휘했고 국정을 일사불란하게 이끌었음을 나타내기 위해 만들어낸 이야기일 수 있다.

어쨌든 수령 700년이 넘은 이 소나무가 산불이나 태풍, 폭설 등 재해로부터 손실되는 것을 막기 위해 몇 년 전 국립 산림과학원과 문화재청이 소나무의 DNA를 추출, 영구보존하는 한편 복제나무를 키워왔다. 바로 세종시청 마당에 심은 소나무가 정이품송에서 나온 후계목인 것이다. 공식 이름이 후계목이지 정이품송의 손자뻘 되는 셈이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 2004년 ‘신행정수도특별법’이 헌법재판소에서 위헌으로 판결나자 다시 이름을 바꿔 2005년 5월 18일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을 위한 특별법’을 제정했고 그것이 오늘 세종시의 출발의 모태가 된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때 이를 기념하여 충북도가 정이품송 후계목을 청주시 상당공원에 심었다가 이번 세종청사 준공에 맞춰 옮겨 심은 것이다.

그러니까 이 소나무를 보는 사람들은 ‘이제 나무도 인공적으로 유전자를 보존할 수 있고 후계목도 배양할 수 있구나’하는 현대과학의 발달을 실감할 수도 있고 또는 ‘세조의 서슬퍼런 위세에 가지를 번쩍 든 소나무의 후손이 여기 세종시에서 뿌리를 내렸구나’하고 역사를 회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먼 먼 훗날, 이 소나무가 거목이 되었을 때 대한민국은 어떤 위치에 있을까를 상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특히 소나무는 우리 민족의 마음을 담은 가장 사랑받는 나무. 그래서 조선 궁궐과 마주하는 서울의 남산에는 오직 소나무만 가꾸고 잡목은 아예 뿌리를 내릴 수 없게 해 애국가에 나오는 것처럼 ‘철갑을 두른 듯’ 무성하지 않았는가? 낙낙장송(落落長松)의 독야청청한 모습은 선비들이 그리는 인격의 표상이었고 신라시대 황룡사 벽에 그린 솔거(率居)의 노송은 새들이 날아와 부딪힐 정도로 생동감이 넘치는 부처님 세계의 꿈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일송정 푸른 솔’은 만주 벌판을 달리며 독립운동을 하던 선구자들의 위안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세종시에 심은 정이품송의 후계목은 무엇을 역사에 남겨야 할 것인가? 국토균형발전이 마침내 대한민국의 새로운 지방화 시대를 열었다고 증언할 것인가? 아니면 그 비효율로 나라가 후퇴했다고 할 것인가? 정이품 소나무를 심는 마음이 무겁기만 한다.

변평섭 前 세종시정무부시장

© 경기일보(www.kyeonggi.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