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독립투사 김노적 선생의 후손
수원 3·1운동 주도했던 할아버지 일제에 고문·옥고… 광복군서 활약
수감 기록·독립운동사진 등 없다고 독립유공자 인정 못 받아 안타까워
“일제강점기 시절 고문을 당해 머리가 함몰되고 왼쪽 손목을 평생 사용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광복군에 입대한 아버지는 진정한 독립운동가입니다”
광복 70주년을 앞둔 6일 수원지역의 숨겨진 독립운동가였던 김노적 선생의 차남 김지형옹(77)의 눈시울은 어느새 촉촉이 젖어 있었다. 김옹은 “몸이 아픈 가운데서도 나라를 걱정하던 아버지는 진정한 애국자였다”며 아버지에 대한 기억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1895년 5월12일 수원군 수원면 산루리(교동) 332번지에서 태어난 김노적 선생은 민족대표 48인으로 지칭되는 김세환 선생의 지도를 받아 수원지역의 3·1운동을 주도했지만, 대중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1919년 2월 서울과 지방에서 3·1운동을 위한 지하활동이 시작되자 김세환 선생과 수원상업강습소에서 거사를 모의했다. 마침내 3월1일 저녁이 되자 군중 동원을 맡은 김노적 선생 등은 창룡문 봉수대에 올라가 횃불을 치켜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거사는 성공했지만 김노적 선생은 수괴로 지목·체포돼 수원경찰서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이로 인해 갈비뼈 4개와 왼팔이 부러지고 두개골이 함몰됐지만, 끝까지 일제의 압력에 굴하지 않았다.
이후 교사생활을 하며 신간회 활동을 벌이던 김노적 선생은 1939년에 중국으로 건너가, 1941년 광복군에 자원 입대했다. 당시 그는 고문 때문에 왼팔이 망가진 상태였다.
김지형옹은 “어린시절 기억을 떠올려보면 아버지는 고문 후유증으로 늘 아픈 분이었다. 어깨와 다리를 주물러드리다 보면 일제에 당한 고문으로 두개골이 함몰되고 곳곳에 흉터가 가득했다”며 “그야말로 살아계신 게 신기할 정도였다”고 기억했다.
더욱이 몸이 망가진 김노적 선생은 사실상 생계를 책임질 수 없는 상태여서, 가족들은 항상 가난에 시달려야 했다. 김옹은 “지금은 형편이 나아졌지만, 과거에는 정말 살림이 어려웠다. 어머니는 먹을 것이 떨어지면 편찮으신 아버지를 대신해 이웃집에 동냥을 다니며 고생했다”고 털어놨다.
이처럼 김노적 선생이 수원지역 3·1운동의 중심인물이었음에도, 여전히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는 못하고 있다.
이에 대해 김노적 선생의 손자 김현학씨(48)는 “할아버지의 수감기록이나 독립운동사진 등 구체적인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며 “물론 할아버지가 상을 받자고 독립운동을 하신 건 아닐테지만, 후손으로서 안타까울 따름”이라고 말했다.
송우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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