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는 과거의 인물 아닌… 현재 우리사회의 지도자

광복 70주년, 경기도 학술 토론회
다양한 문화콘텐츠 개발… 이 시대 국민과 함께 할 수 있어야

지난 11일 경기연구원 7층 대회의실에서 경기일보와 경기연구원이 주최하고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가 후원한 광복 70주년 경기도학술세미나가 ‘경기도 독립운동가, 오늘의 길을 열다’를 주제로 열렸다.

본보와 경기연,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는 지난 5월13일 광복 70주년 기념 경기도학술토론회를 시작으로 5차례의 국내 학술토론회와 중국 만주 독립운동 사적지 탐방, 한중 학술토론회를 진행하고 이날 마지막 학술세미나를 가졌다.

박정신 숭실대 전 부총장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세미나는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매국사학으로 변질된 식민사학-독도와 간도문제를 중심으로)과 김동환 국학연구소 연구위원(구국의 역사관과 무장투쟁 그리고 법과 외교), 허성관 전 광주과기원 원장(경기도독립운동가 만주 사적지 탐방), 강진갑 경기대 교수(경기도 독립운동가 현양 및 사적지 활용 방안)가 발표자로 나섰다.

특히 참의부 참의장 희산 김승학 선생의 증손인 김병기 박사는 조부가 남긴 독립운동 관련 자료를 제시하며 정부와 경기도에 체계적인 유공자 헌향 사업과 경기도독립운동기념관 설립 추진을 건의했다.

■ 매국사학으로 변질된 식민사학(독도와 간도문제를 중심으로)-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은 “일각에서는 식민사학이 다 사라진 것이 아니냐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는 중증을 앓고 있는 환자가 다 치료됐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며 “이 자리에서는 독도와 간도 문제만 가지고 얘기하지만 고대사부터 얘기하면 더욱 심각하다. 하루빨리 대한민국의 역사관을 다시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덕일 소장은 식민사관에 대한 문제제기는 오래됐다고 밝혔다. 식민사학이란 일제강점기 때 일본 제국주의의 시각으로 바라본 한국사를 뜻한다. 구체적으로는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에서 만든 한국사관(韓國史觀)을 뜻한다. 일제강점기 때 김교헌, 박은식, 신채호, 정인보 등의 독립운동가들은 이런 식민사관에 맞서 싸웠다.

▲ 경기연구원과 경기일보 주최로 11일 경기연구원 대회의실에서 열린 ‘광복 70주년 기념 경기도 학술토론회’에서 허성관 전 광주과학기술원 총장이 ‘경기도 독립운동가 만주 사적지 탐방’과 관련 주제발표를 하고 있다. 전형민기자

해방 후 한국은 일제 식민사관을 해체하고 이런 독립운동가의 역사관으로 한국사를 재정립해야 했지만 이병도, 신석호 같은 조선사편수회 인물들이 학계를 장악하면서 일제 식민사관은 해방 후에도 주류가 됐다. 그런데 해방 후 대한민국에서 일제 식민사관을 추종하는 것은 곧 매국사관이다.

그간 식민사학자들은 총론으로는 식민사학을 비판하고 각론으로는 추종하는 행태를 반복해왔다. 그 결과 식민사관의 주요 논리가 한국사에서 되살아나는 행태가 나타나고 있다. 이덕일 소장은 그간 많은 비판이 있어왔던 한사군 한반도설은 제외하고 독도와 간도문제를 둘러싼 식민사관의 현황에 대해서 살펴봤다.

한·일간에 독도문제를 둘러싼 갈등은 오래됐고 지금도 진행형이다. 일본은 독도가 시마네(島根)현에 소속된 섬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 역사학자들 사이에도 독도가 우리 땅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덕일 소장은 ‘문헌적 인식에 갇히면서 우선 명칭의 혼란과 죽도로의 이전 과정에서 독도는 사라졌다가 자본주의 세계체제에의 편입과 동시에 대한제국의 영토로 불쑥 나타나게 된다’는 한 학자의 말을 인용하며 “일부 학자는 독도가 우리것이 아니었다가 마치 대한민국 영토로 편입된 것처럼 얘기한다”며 “오히려 일본 학자들의 주장을 더욱 자세하게 펼치는 학자도 있다”고 밝혔다.

또 이 소장은 간도 문제에 대해 “간도를 되찾자고 외치면서도 되찾아야 할 땅이 어디인지, 얼마나 되는지를 모른다는 사실은 간도 영유권 주장이 얼마나 허술한 것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며 “이런 식의 비본질적인 주장이 간도 되찾기 운동을 간도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펼치는 무식한 운동으로 비춰지고 있다”고 밝혔다.

이덕일 소장은 “동북아역사문제에 관한 한 대한민국의 공식창구인 동북아역사재단의 역사관은 이미 중국과 일본이 장악한 것이다. 우리가 해방 후 70년이 되도록 식민사학, 즉 매국사학을 해체하지 못한 결과 이미 역사관은 외국의 노예로 다시 전락한 것”이라며 “역사는 이미 팔아넘겼으니 남은 것은 영토가 외국의 것으로 넘어가는 것뿐이다.

국제정세가 대한민국에 불리하게 돌아가서 100여년 전과 같은 상황이 온다면 ‘신(新)일진회’ 깃발 들고 나설 인물들이 대한민국 요로에 곳곳이 활개치고 있는 것이 광복 70주년을 맞이하는 대한민국의 민낯이다”라고 역설하며 “식민사관에서 벗어나 대한민국 역사관의 정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구국의 역사학(김교헌-김동환)과 무장투쟁(김혁-박환) 그리고 법과 외교(박찬익-김병기)-김동환 (사)국학연구소 연구위원

김동환 연구위원은 김교헌, 김혁, 박찬익 선생 등 경기도 독립운동가 3인에 대한 활동 상황에 대한 분석으로 통해 “주인의 눈으로 역사를 보느냐 노예의 눈으로 보느냐가 역사관의 중요한 부분”이라며 “주인의 눈으로 바로된 역사관을 세울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김혁의 본명은 김학소로 1875년 용인시 기흥읍 농서리에서 구한말 법부 참서관을 지낸 아버지 김태식과 어머니 윤현숙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김혁은 경주김씨 갈천공 김원립의 11대 손으로, 집안은 대대로 지방의 양반가문이었다.

향리에서 스승 맹보순으로부터 한학과 민족의식을 교육받았던 김혁은 1898년 6월22일 대한제국의 무관학교에 입학했다.

김혁은 북만주 독립운동계의 최고 지도자로 무장투쟁에 앞장섰으며, 직책상으로 보면 김좌진 장군보다 높은 직책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평가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다만 용인시 구갈동 강남대학교 인근에 김혁장군기념비가 1985년 8월15일 세워진 것이 고작이다.

▲ 학술토론회를 마친 참석자들이 박수를 치며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전형민기자

김동환 연구위원은 “앞으로 김혁 장군의 항일투쟁에 대한 자료 발굴과 연구가 경기도와 용인시, 그리고 도교육청 차원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돼야 할 것”이라며 “광복 70주년을 맞이해 경기도가 낳은 독립운동사 최고의 지도자였던 김혁 장군에 대한 청소년 교육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이어 김 연구위원은 “남파 박찬익은 10대 약관의 나이에 이미 비밀결사인 신민회의 활동에 깊이 관여했다”며 “박찬익은 임시정부와 중국 국민당 요인들 간의 막후교섭의 창구였다. 임시정부에 외교부가 있었지만 중국 정부와의 관계에서 중요한 일들은 모두 그의 막후 협상을 통해 이뤄졌다고 할 수 있겠다”고 설명했다.

특히 김 연구위원은 “이와 같이 독립운동 선상에서 박찬익의 큰 역할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그의 공적에 대한 평가가 미흡한 것은 남에게 공을 돌리는 겸양과, 직책이나 명성에 얽매이지 않는 그의 분방한 천품에 기인한다”며 “만주에서나 중국 관내에서 그는 관직이나 특별한 직책을 가지지 않고 자연인 혹은 개인 자격으로 오히려 더 폭넓은 민간교섭과 외교활동을 벌였는데, 이것이 그의 독특한 외교 스타일이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수원 출신의 무원 김교헌(金敎獻, 1868-1923)은 중화사관을 극복하고 일제식민주의사학에 정면으로 대항한 민족주의사학의 개척자였다. 백암 박은식의 국혼이나 단재 신채호의 낭가정신도 김교헌의 역사정신을 외면하고는 성립할 수 없다.

당시 그의 죽음 앞에 지식인들 모두가 울었던 이유다. 그는 민족의 모범적 지도자요 국학상의 둘도 없는 대학자였다. 김교헌의 역사서술은 건국시조인 단군을 우리 민족사와 연결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 연원을 역사적으로 규명하고자 했으며, 이는 우리 민족사의 정통을 체계적으로 세워 종래의 사대주의사상을 불식하고 민족주의사관을 세우고자 했다. 그러므로 그의 역사는 중화와 식민의 그늘을 넘어선 한민족사 그 자체 인 동시에 단군을 중심으로 한 우리 민족의 사상서이자 문화서로도다. 이러한 김교헌의 역사인식은 후일 박은식·신채호뿐만이 아니라 유근·장도빈 등 수많은 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김동환 연구위원은 “아직도 청산하지 못한 식민사관의 그늘 속에서 이것이 우리의 진정한 역사라고 외칠 수 있는 기준을, 김교헌은 우리에게 던져 주었다”고 밝혔다.

■ 경기도 출신 애국지사 독립전쟁 사적지 답사-허성관 전 광주과기원 원장ㆍ전 행정자치부 장관

허성관 전 원장은 “경기도 출신 독립운동가의 유적지를 답사하는 동안 그들이 얼마나 대단한 활동을 벌였는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며 “유적지 탐방을 통해 인간이 이렇게 치열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인가를 새삼 알 수 있었다. 이들에 대한 경기도 차원의 적극적 현양 사업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중국 경기도 독립운동가 유적지 답사는 지난 7월22일부터 27일까지 이뤄졌다. 답사 출발지인 연길은 중국에 있는 연변 자치주의 주도이다. 연변의 면적은 남한의 절반 정도의 크기로 인구는 250만명에 달한다.

허 장관은 “독립운동에 나섰던 사람들은 대단한 사람이다. 짚신을 신고 450㎞를 걸어서 이동 전쟁을 하고 일본군을 격파했다. 이런 것이 독립투쟁이다. 몸으로 느껴야 한다. 독립전쟁 현장을 보지 않고는 그들에 대하 누구도 함부로 이야기 할 수 없다”고 말했다.

▲ 중국 도문시 봉오골반일전적지(왼쪽). 무원 김교헌, 홍암 나철, 백포 서일 선생이 안장된 대종교 삼종사의 묘. 경기일보 DB

길림성 도문시에 있는 봉오동 전투지는 뿌얼하통과 해란강이 합류하는 근처에 위치해 있다. 지난 6월7일은 봉오동 전투 승전 95주년 기념일이었다. 당시 독립군은 일본군 대대 병력을 괴멸시켰다. 봉오동 저수지 둑 앞에 세워진 봉오동 전투 전적비 뒤에는 홍송이 병풍처럼 우거져 있다.

이어 시인 윤동주 생가가 있었던 명동촌을 찾았다. 용정에서 남쪽으로 20여㎞ 떨어진 명동촌은 지난 1899년 함북 회령 출신 김약연과 김하규, 종성의 문치정과 남위원 4개 가문의 24가구, 141명이 집단 이주해 개척한 지역이다.

 

 

명동촌에 1901년 개교한 학교가 ‘명동학교’가 있는데 일제가 폐교시킬 때가지 25년 동안 수많은 인재를 양성했다. 이들이 대일 항쟁에 참여해 독립투쟁을 벌였다.

명동학교에는 경기도 출신의 여준(1862-1932) 선생이 1908년께에 교사로 재직했다. 여준 선생은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죽림리 출신으로 20대에 서울에서 이상설, 이회영, 이시영 등과 공부했고 1906년 8월 이상설이 만주에 최초로 세운 민족교육 기관인 ‘서전서숙’’ 교사에 이어 명동학교와 정주 오산학교 교사를 지냈다. 1910년부터 1917년까지 신흥무관학교 교사와 교장을 역임하고 1919년 무오독립선언 주도, 서로군정서 부독판으로 헌신하다 1932년 순국했다.

대종교 3종사 묘을 찾아 한국에서 가져간 소주로 묘제를 올렸다. 대종교 3종사는 대종교 1대 종사 나철(1863-1916), 2대 종사 김교헌(1863-1923), 북로군정서 총재 서일(서일 1818-1921)의 묘를 말한다. 대종교 3종사는 용정에서 화룡으로 가면서 화룡시 첫 신호등에서 좌회전 후 첫 네거리에서 다시 좌회전, 아름다운 버드나무 가로수 길이 끝나는 지점 우측 산기슭 150m 지점에 위치해 있다.

무장독립투쟁의 최대 격전지인 청산리 전투지를 찾았다. 청산리 전투는 1920년 10월21일부터 26일 사이 김좌진, 최진동, 홍범도 등이 지휘한 만주 독립군 연합 부대가 만주 화룡현 청산리 백운평·천수평·완루구 등지에서 10여차례에 걸쳐 일본군을 섬멸한 전투다.

청산리는 화룡에서 백두산 입구인 이도백하 가는 길에서 북쪽에 있으며 골짜기가 40km가 넘는 지역이다. 장백산맥의 줄기라서 산악지대이며 수림이 무성한 곳이다.

청산리 전투 당시 이 지역에는 대부분 대종교도인 조선인 200여호가 있었고 하교도 2개나 있었다. 청산리 입구에는 현재 중국 산림청 출장소가 있어 목재 생산을 관리하고 있다. 경기도 출신으로 청산리 전투에 참가한 대표적인 분은 김혁 장군으로 만주 독립군 3부 중 신민부 최고 지도자가 됐다.

이어 신흥무관학교를 방문했다. 신흥무관학교는 양명학자, 개혁적 유림, 신민회 인사들이 기획해서 처음 삼원포 추가가에 신흥강습소를 개교했다가 1911년 함니하에 교사를 신축했다. 학교 설립에 우당 이회영 선생의 둘째 형님인 이석영 선생이 자금을 쾌척했다. 1920년에 학생 수가 증가해서 이를 수용하기 위해 고산자로 이교하고 합니하는 분교로 운영했다.

1920년 봉오동, 청산리 전투 후 일제가 경신참변을 일으키고 일제의 압박이 강화 되자 신흥무관 학교는 페교됐됐다. 신흥무관학교는 10년 동안 3천500여명의 독립군 장교를 배출했다. 이들은 이후 무장 독립항쟁에서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 경기도 독립운동가 여준은 신흥무관학교 교장을 역임했고 윤기섭은 신흥무관학교 출신으로 임정 의정의원을 역임하고 2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허 전 원장은 “여준 선생과 윤기섭 선생이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설립자가 떠났는데 10년 동안 끝까지 신흥무관학교를 붙들고 있었다. 폐교 직전에 10년 동안 지켜낸 것은 두분의 힘이다”며 “독립운동가들이 활동한 현장을 보지 않고는 그들을 누구도 함부로 이야기 할 수 없다”고 말했다.

■ 경기도 독립운동가 현양 및 사적지 활용 방안- 강진갑 경기대 교수

강진갑 경기대 교수는 “광복 70주년을 맞이해 다양한 기념 사업이 전국적으로 펼쳐지고 있다. 독립운동은 과거의 역사가 아니요 현재 진행형 역사이다.

독립운동가 역시 과거의 인물이 아니라 현재 우리시대에 영감을 주고 나아갈 바를 가르켜 주는 현재 우리 사회의 지도자”라며 “경기도 독립운동가 현양과 독립운동 사적지를 활성화 시키기 위해서는 독립운동가와 사적지에 대한 체계적인 조사 연구와 함께 다양한 문화콘텐츠가 제작돼 시민들에게 독립운동가와 독립운동사가 과거가 아닌 지금 현재 우리와 함께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강 교수는 “광복 기념행사들이 다양하게 펼쳐지고 있는데 15일이 지나면 어떨까 내년이면 어떨까 다 잊어버리면 어쩌나 하는 우려가 든다”면서 “역사학자들은 앞으로 다양한 콘텐츠를 활용한 학문적 연구와 더불어 역사를 어떻게 국민들과 함께 할 수 있는가에 관심을 가져야한다”고 말했다.

국가보훈처에서 2009년 국립묘지, 독립기념관, 현충탑, 순국선열 기념시설 등 독립운동 관련 사적지와 시설 등에 대한 국민의 관심도를 조사하고 발표한 자료 ‘국민보훈의식지수 조사 결과 보고서’의 내용은 이러한 우려를 뒷받침한다.

독립운동 관련 사적지와 시설에 대한 방문 빈도를 묻는 질문에 한 두 차례 방문이 48.9%로 가장 높았고 전혀 방문한 적 없다는 응답도 13.9%였다. 전체의 62.4%는 자주 방문하지 않은 것으로 조사돼 독립운동 관련 사적지와 시설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그리 크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청소년들에 대한 조사 결과도 일반 국민과 대동소이하다.

최근 영화 ‘암살’이 개봉됐다. 영화 ‘암살’은 1930년대를 배경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조선주둔군 사령관과 친일파를 암살하기 위해 암살단을 파견하는 것을 줄거리로 한다. 역사적 사실과 작가의 상상력이 보태진 작품이다.

독립운동과 친일 문제, 특히 해방직후 반민특위 문제까지도 정면으로 다루고 있어 우리 시대에 주는 메시지가 분명한 영화이다. 그래서인지 개봉 20일 만에 관객 900만명을 돌파했다. 이 영화의 흥행 성공이 시사한 바는 크다.

▲ ’광복 70주년 기념 경기도 학술토론회’ 참석자들이 ‘경기도 독립운동가, 오늘의 길을 열다’란 주제로 토론을 벌이고 있다. 전형민기자

역사학자들은 독립운동, 친일 문제, 반민 특위에 대해 많은 글들을 집필하고 발표했으나, 이 영화 ‘암살’ 한 편이 이 문제에 대한 대중 전파력이 훨씬 강렬하다는 것이다.

독립운동가와 독립운동을 교과서 속에, 역사 창고 속에 넣어 두지 않고 우리시대에 우리와 함께하기 위해서는 학문적인 조사 연구와 함께 대중들이 쉽게 다가가고 함께 할 수 있는 문화콘텐츠 제작이 병행돼야 함을 이 영화가 일깨워 주고 있다.

이에 따라 강 교수는 독립운동가 현양사업은 크게 4개의 단계로 나누어 진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1단계 잊혀진 독립운동가 찾아내는 단계 △2단계 독립운동사에 대한 기초적인 자료 조사 연구 단계 △3단계 독립운동가 스토리를 발굴 구성하고 문화콘텐츠를 제작해 시민에게 독립운동가를 알리는 단계로 3단계까지는 독립운동가 관련자 및 단체, 중앙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중심이 돼 추진되는 단계 △4단계 시민이 인물 현양에 공감해 시민이 자발적으로 인물을 기억하거나 관련되는 켄텐츠를 제작해 보급하거나 함께 향유하는 단계로 인물 현양의 최고 단계라 할 수 있다.

강 교수는 “광복 70주년을 맞이해 경기도 독립운동가 현양과 독립운동 사적지를 활성화 시키기 위한 두 가지 방안을 제안한다”며 “독립운동가와 사적지에 대한 체계적인 조사 연구를 시작하고 다양한 문화콘텐츠가 제작을 통해 시민들에게 독립운동가와 독립운동사가 과거가 아닌 지금 현재 우리와 헴께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 독립운동가 후손의 증언(정부와 경기도에 바란다)-희산 김승학선생 증손 김병기 독립운동사편찬위원장

김병기 독립운동사편찬위원장은 “독립운동사에 대한 정립은 개인이나 단체가 할 수없는 만큼 국가적 사업으로 이뤄져야 한다”며 “정부와 경기도는 독립유공자에 대한 발굴과 함께 독립운동사의 정립은 미래지향적 통일국가를 대비하는 방향으로 시대에 부응하는 거대한 사업이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병기 위원장은 지난 10일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증조부인 희산 김승학 선생의 독립운동 자료를 기탁했다.

봉오동전투에 직접 참가한 박승길 선생에 의해 그려진 봉오동전투도를 비롯해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등 삼의사의 장례식 진행 자료가 최초로 공개됐다. 특히 이번 기탁자료에는 김승학 선생이 백암 박은식 선생을 도와 펴내려고 했던 ‘한국독립사’ 수집 자료 가운데 중국지역 독립운동가 2만500명의 자필 혹은 후손들이 기록한 개인 이력서가 포함돼 관심을 모았다.

희산 김승학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학무국장과 임시정부 주만 육군참의부 참의장을 지낸 독립운동가이자 역사학자로 상해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 사장(1921∼1924)을 지냈다. 1965년에는 독립운동가의 시선에서 기록한 ‘한국독립사’를 펴내기도 했다.

김 위원장은 “독립운동사를 너무 쉽게 생각하는데 한 나라가 독립을 찾게되면 독립운동가에 대한 포상과 친일파 청산이 분명하게 이뤄져야 한다. 그러나 해방 직후 우리는 그것을 하지 못했다. 해방 이후 친일파가 사회 중심이 되다 보니까 1980년대까지 독립운동사가 제대로 정립되지 못했다. 광복 30년이 지나서야 연구대상이 됐다”고 설명했다.

 

▲ 사회 박정신 前 숭실대 부총장

김 위원장은 “희산 김승학선생의 독립운동사를 편찬했는데 그 책에는 2만500명의 독립운동가의 활동 약력이 기재돼 있다. 하지만 현재 보훈처에서는 희산 선생의 공식 기록에도 못 미치는 1만3천900여명의 독립운동가를 서훈했다”며 “친일파가 득세한 대한민국의 실정에서 절대다수의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은 나라로부터 버려진 채 가난과 저학력으로 고통받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생생한 증언을 남겨줄 독립운동의 원로들은 대부분 고통과 가난속에서 생을 마감했다”며 “대한민국 정부는 이들 독립유공자들이 누구를 위해 독립투쟁을 벌이다 돌아가셨는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 위원장은 “정부와 경기도는 독립유공자에 대한 체계적이고 대대적인 현양 사업과 함께 경기도독립기념관 건립을 추진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최원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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