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여는 역사의 門 해방 70년 京畿] 30. 수원고농, 경기도 항일학생운동의 중심에 서다

식민지 조선 청년들 ‘강한 주먹’으로 시대와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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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고농 학생들이 입학직후 찍은 사진
1910년 8월부터 1945년 8월까지 36년 동안 한반도는 거대한 감옥이었다.

일제가 조선에서 시행한 교육은 식민지 체제에 순응하고 권력에 복종하는 ‘충량한 제국신민’을 양성하는 일이었다. 일본어가 ‘국어’이며 일장기가 ‘국기’였다. 모든 교과서는 일본어로 제작됐다. 고등교육을 받은 조선인들 중에서 민족정신을 말살하는 일제의 교육과 수탈을 위한 개발정책에 발 벗고 나서는 친일파들이 적지 않았다.

 

학교는 식민지의 축소판이나 다름없었다. 수원고농을 졸업하면 교원 자격증을 주고 ‘주사’라는 자리를 보장했기에 전국의 수재들이 몰려들었다. 민족차별은 수원고농에서도 일상적으로 벌어졌다. 교장과 교수, 일본학생들이 공공연하게 조선인 학생을 멸시했다.

“무엇이든 잘못된 것은 모두 ‘조선식’이다”라는 일본 학생과 교수들의 멸시와 차별에 조선인 학생들은 분노했다. 일본 교수와 학생들은 잘 되려면 ‘일본식’으로 해야 한다고 강요했다. 조선인 학생들이 생활하는 동료(관)과 일본인 학생이 생활하는 서료(관)은 생활환경부터 크게 차이가 났다. 조선 학생과 일본 학생은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았다.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한국 학생들에게 “조선음식은 냄새가 난다”, “더럽다”며 먹지 못하게 하고 일본 음식을 주었고, 식탁에 갖다 놓았던 김치를 일본인 학생이 내다 버리는 일도 벌어졌다. 수원고농의 조선인 학생들은 1920년대부터 동맹휴학을 비롯한 다양한 방식으로 일제의 차별정책에 저항했다.

 

1928년 9월1일, 우종휘, 김찬도 등 수원고등농림학교(이하 ‘수원고농)’ 재학생 11명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경기도 수원경찰서에 연행됐다.

 

체포된 학생들의 연령대는 21세부터 27세까지 다양했다. 세상에 ‘수원고농사건’으로 알려진 이 사건이 던진 사회적 파장은 매우 컸다. 31운동 이후 최초의 조직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에 대처하는 조선인 동료 학생들의 태도도 화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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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고농사건을 다룬 당시 언론 보도
9월17일 아침, 일본인 교장이 연행된 11명 중 5명은 퇴학, 6명은 무기정학에 처하고, 조선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2시간 동안 훈시했다. 학생들은 이 같은 교장의 처사에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나흘이 지난 9월21일, 조선인 학생들은 연명 날인한 퇴학계를 학교 당국에 제출하고 언론에 사건 경위를 알리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학생들의 집단행동으로 이 사건은 더욱 세인들의 주목을 받게 됐다.

 

‘수원고농사건’은 1928년 봄에 수원고농을 졸업하고 경남 김해공립농업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김성원(1906~1998, 농학박사, 학술원회원)이 그 해 여름 외금강에서 중등교원 하계강습을 받다가 체포되면서 불거졌다.

학생들에게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을 고취시킨 혐의로 아들이 체포됐다는 소식을 들은 김성원의 부친이 급히 김해로 달려가 숙소에서 문제가 될 법한 물건을 찾아내 모두 없애버렸다. 그러나 한 통의 편지가 남아있었다. 

경찰들이 책갈피 속에서 찾아낸 이 편지는 수원고농 재학생 우종원이 보낸 것인데, 비밀결사 흥농사(興農社)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는 단서가 들어있었다. 김해경찰서로부터 사건을 이첩 받은 수원경찰서 소속 경찰들이 조선인 학생 기숙사를 수색하여 찾아낸 ‘건아단(健兒團) 강령’은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단기4261년(1928) 6월3일 자에 작성된 강령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된다.

 

“본회는 신조선(新朝鮮) 건설을 목표로 문약(文弱)의 폐풍을 일소하고 상무적(尙武的) 정신을 함양하는 데 있다.”

 

강령은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유도부, 권투부, 탐험부를 둔다고 규정하고 있다. 건아단이 추구하는 궁극의 목표는 ‘신조선의 건설’ 곧 일제의 압제로부터 해방되는 정치적 독립이었다. 건아단은 생활 개선 운동부터 시작했다. 

먼저 늦잠 자는 학생들의 나쁜 습관을 고치기 위해 조기회를 조직해 체조와 냉수욕을 시작하고 술과 담배를 끊는 운동을 벌였다. 등산이나 여행을 통해 심신단련에 지속적인 노력을 쏟았다. 밖으로 드러난 건아단의 활동은 매우 건전한 것이었다.

물론 이들의 핵심 활동은 다른 것에 있었다. 1928년 6월 하순, 건아단 회원을 중심으로 ‘조선개척사’라는 비밀조직을 결성했다. 세부 계획을 세우기 위해 이들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학교에서 한참 떨어진 여기산 정상에 올라가 새벽 2시까지 의견을 교환했다. 

이 모임에 참여한 맹원은 수원고농 사건으로 체포된 11명이다. 건아단을 이끌었던 김찬도(1907~1994, 소설 <순교자>의 작가 김은국의 부친)는 광복 후 이렇게 회고했다. 

“기미년 독립운동에 수원사건으로 수백명의 애국동포가 잔인무도한 일본 군병에게 화장당한 제암리도 단(團)을 지어 방문했고, 돌아오는 길에서는 애국가를 합창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우렁차게 불렀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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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고농학교 학생들
이처럼 건아단원들은 민족 고난의 현실을 직시했다. 동포들이 살해당한 수난의 현장을 직접 답사하여 일제의 만행을 두 눈으로 확인하며 복수를 다짐했던 것이다. 

건아단이 주력했던 사업은 야학운동이었다. 가난으로 배움의 기회를 갖지 못한 지역 어린이들을 모아 우리말과 역사를 가르쳐 민족의식과 사명감을 일깨웠다. 

아래 소개하는 것은 농과3년 권영선이 지도한 고색리 야학강습소의 특별반 학생 김이덕의 작문 ‘우리 소년이 해야 할 것’의 일부분이다.

 

“우리들은 지금은 소년입니다. 우리들이 할 수 있는 것은 태산같이 쌓여 있습니다. 반도에 살고 있는 우리 소년은 지금 결박되어 있는 입장입니다. 우리들은 지금은 국가도 없는 불행한 국민입니다. 이전에 어떻게 하여 그렇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지만, 일단 우리들은 국가가 없기 때문에 우리 소년들이 다시 국가를 세우기 위해 행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조선개척사’는 일본이 외국과 전쟁을 벌이는 기회를 이용하여 ‘농민봉기’를 일으켜 조선 독립을 쟁취하려는 목표를 세웠다. 학생들은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정치적 문구를 빼고 단체의 명칭도 농민을 흥기시키겠다는 ‘계림흥농사’로 바꾸었다. 김찬도와 우종휘가 중심이 된 계림흥농사는 수원고농 출신 선배를 비롯해 국내외에 있는 모든 농학도를 포섭하여 전국 농촌에 협동농장을 통해 이상농촌 건설을 목표로 설정했다.

 

조선개척사가 결성되기 한 해 전인 1927년 2월15일,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협력해 민족단일전선을 결성해 공동의 적인 일제와 투쟁할 것을 목표로 신간회가 출범되었다. 신간회는 흩어진 대오를 하나로 모아냈다. 이듬 해 수원에도 신간회 지부가 결성되어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조선개척사는 신간회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파악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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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전경
1928년 조선개척사 사건 이후에도 수원고농에서의 저항운동은 계속됐다. 같은 해 4월 수원고농에서 농학과에 입학한 김종수를 중심으로 상록수운동을 통해 야학운동을 더욱 확대하고 농민들을 대상으로 문맹 퇴치운동을 함께 벌였다. 

1933년 10월에는 사회주의 비밀결사인 독서회가 조직됐다. 1939년 4월 수원고농에서 정주영을 비롯한 학생 10여명이 ‘한글연구회’를 설립했다. 1942년에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주동자 정주영을 비롯한 여섯명이 체포되어 구속됐다.

일제 고등경찰의 조사에 따르면 1938년 경기도에서 열린 시국집회가 6천113건에 달했으며 참여 인원이 160여만명이나 됐다. 이러한 경기도 저항운동의 바탕에 수원고농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수원고농의 불의에 저항하는 전통은 유신독재시절에도 이어졌다. 1975년 4월11일, 서울농대 축산과 4학년 김상진의 양심선언과 할복은 유신철폐운동에 불을 질렀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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