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이맘때면 바로 옆 천리포의 수목원이 수줍게, 그러나 찬란하게 변색을 한다. 10여 년 전 세상을 떠난 미국인 민병갈(본명 C.F. Miller)씨가 평생을 가꾸어 온 이 수목원은 세계 60여 나라 식물 1천3백 종이 잘 가꾸어져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적 수목원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그는 1979년 한국인으로 귀화했고 평생 수집해온 이 수목원을 그가 사랑했던 한국에 남기고 2002년 세상을 떠났다. 그가 생전에 그토록 사랑했던 이곳 안면도는 그만큼 가을에 빛을 발한다. 천리포 수목원에서 좀 더 남쪽으로 내려오면 꽃지해수욕장이 있고 이 일대의 늘펀한 횟집들이 대하축제를 찾는 여행객들의 발길을 잡아 끈다.
안면도의 가장 숨겨진 보물이라고 할 수 있는 적송(赤松) 휴양림!
어쩌면 저렇게 밋밋하고 고고하게 수많은 세월 억센 해풍을 거스르며 하늘을 향해 뻗어날 수 있었을까? 한 떼의 홍학이 모여 기도라도 하는 듯 그렇게 붉은 몸통의 노송들이 조용히 바람 소리를 내고 있다.
이 아름다운 안면도의 가을. 그러나 안면도의 아름다움 뒷면에는 냉혹한 사연들도 엮여있다.
원래 안면도는 섬이 아니었다. 1638년 인조 16년은 나라가 병자호란으로 쑥대밭이 된 지 채 1년밖에 안되었는데 조정에서는 안면도 북쪽 신온리와 남쪽 창기리를 뚫는 대운하 공사를 벌였다. 그래서 전국 각지에서 많은 백성이 노역에 동원되었다.
지금처럼 현대식 장비가 갖추어지지 않은 그 시절 이런 대공사를 한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더욱이 병자호란으로 국고가 바닥나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도 이처럼 일을 벌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역시 텅 빈 국고를 채우기 위해서였다.
지금도 안면도 근해에는 고려 혹은 조선시대 선박이 심심찮게 인양되고 있다. 조선조의 절대적 재원인 호남의 곡물을 싣고 한양을 향하던 선박, 호남지방의 분청사기를 비롯 왕실 용품을 가득 실은 선박…. 이런 선박들이 안면도 근해의 험한 물살과 복잡한 지형에 갇혀 좌초되곤 했던 것.
원래 이곳 물살이 험하여 난행량(難行梁)이라 했는데 조운선(漕運船)의 사고가 너무 많아 지명을 안면도로 까지 고쳤고 안파사(安波寺)라는 절도 세웠지만, 그래도 사고는 줄지 않았다.
거기에다 호남지방에서 올라오던 배가 이곳에 이르러 일부러 조난을 당한 것처럼 허위 보고를 하고는 배에 실었던 곡물을 빼돌려 암거래하는 일도 자주 발생했다.
그래서 백성들 사이에서는 ‘안면도에서는 쌀이 썩는다’는 말이 나돌았다. 조정에서도 이런 정보를 입수하여 현지에 조사관을 파견해 보았지만 조사관들도 한통속이 되어 뇌물을 먹고 유야무야해버린 일이 잦았다는 것.
그렇게 조선은 부패가 만연했던 것이다. 정부 국고에 들어가야 할 세곡을 험한 바다가 삼키고, 멀쩡한 배도 조난당한 것처럼 도둑질하고, 관리들은 그 도둑을 등쳐먹고…. 엉망진창 세월호의 비리구조가 그때도 똑같았다.
그래서 안면도를 돌지 않고 빠르고 안전한 항로를 확보하고 조난을 막기 위해 운하를 만들고 또한 비리까지 없애겠다는 것이었는데, 그렇다고 기강이 바로 잡혔을까? 애꿎게 안면도만 섬으로 만들지는 않았을까? 그 대답은 조선 후기로 접어들면서 더욱 부패가 더해지고 나라까지 망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오늘 심각한 우리의 부패상은 어떤 답을 내놓을 수 있을까?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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