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 5월, 일제는 안산시 선감도에 선감학원이라는 감화원을 세웠다. 이 시설은 8~18세의 부랑 소년들이나 불량 행위 우려가 있는 고아들을 격리한다는 명목으로 만들어졌다. 당시 고아라는 이유로 끌려온 500여명의 아이들은 군수물자 제작에 동원됐고 굶주림과 체벌ㆍ고문 등 가혹행위에 시달렸다.
숨진 소년들은 학원 근처 야산에 암매장됐다. ‘어린이근로정신봉사대’로 불렸던 선감학원 원생들의 이야기다. 이 비극은 2000년 일본인 이하라 히로미쓰(井原宏光)씨에 의해 알려졌다. 이하라씨는 선감도에서 보낸 2년을 바탕으로 ‘아! 선감도’라는 소설을 통해 선감학원의 실체를 알렸다.
일제가 패망하고 1946년 2월 선감학원 관리는 경기도로 이관됐다. 일제강점기가 끝났지만, 1982년 경기도가 선감학원을 완전 폐쇄할 때까지 인권유린은 끝나지 않았다. 이곳에 수용됐었다는 증인들이 선감학원의 비극을 잇따라 폭로했다.
선감학원 출신들에 따르면 1960~70년대 거리를 떠돌던 아이들이 이곳으로 끌려와 범법자 취급을 받으며 바다를 메워 염전을 만드는 등 강제노역에 동원됐다.
노역과 폭력,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고 탈출하다 조류에 휩쓸려 숨진 아이들이 상당수였고, 일부는 상급생들의 성폭력에도 시달렸다. 선감학원은 국립 고아원이긴 했지만 부모나 보호자가 있는 아이도 많았다. 부랑아들이 사회불안을 일으킨다는 이유로 구두닦이나 신문팔이 등이 주요 타깃이 돼 끌려와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았다.
대부도 옆, 3.7㎢에 불과한 조그만 섬 선감도는 1988년 5월 방조제가 생기며 육지와 연결됐다. 이후 선감학원 자리엔 경기창작센터가 세워졌다. 그동안 선감학원의 청소년 학대에 대한 조사는 없었다. 선감학원 출신들 역시 부끄러운 과거로 여기며 수십 년 동안 함구해왔다.
숨겨져있던 선감학원에 대한 진실은 ‘선감학원 원생 출신 생존자회’가 구성되면서 드러나게 됐다. 이제 60대가 된 생존자들이 다시 있어선 안될 인권유린의 현장, 선감학원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용감하게 나선 것이다.
남경필 지사가 지난 5일 경기도의회 본회의에서 “선감학원 관련 진상조사가 필요하고, 그 결과에 따라 상응하는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밝혔다. 늦었지만 베일에 가려진 선감학원의 진실이 밝혀지리라 기대한다. 경기도의 책임있는 조사와 함께 그에 따른 사과ㆍ보상 등의 대책이 마련돼야 한다.
이연섭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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