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 아이들 가슴에 ‘희망의 씨앗’ 심고… 불꽃같은 26년 생애
1935년 1월23일 경기도립 수원의원에 입원해 있던 샘골강습소 교사 최용신이 숨을 거두었다. 향년 26세. 사회장으로 샘골에서 치러진 그의 장례식은 많은 화제를 낳았다. 아이들 200여명을 비롯한 1천명이 사람들이 상여 뒤를 따랐다. 1월 27일 <조선중앙일보>에 ‘수원군하의 선각자 무산아동의 자모 최용신 양 별세’라는 제목의 기사가 최용신의 사진과 함께 실렸다.
최용신양은 금년 26세로 우리 농촌 개발과 무산아동의 문맹을 퇴치코자 1931년 10월에 수원군 반월면 사리에다가 천곡학술강습소를 설립하고 농촌부녀들의 문맹퇴치와 무산아동 교육에 많은 파란을 겪으며 노력 중이던바 불행하게도 우연히 장중첩증에 걸리어 신음하다가 지난 9일에 도립수원의원에 입원하여 개복수술을 받고 치료 중이던바 지난 23일 오전 영시 23분에 쓸쓸한 병실에서 최후로 유언 몇 마디를 남겨 놓고 영원한 세상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한다.
최용신의 불꽃같은 26년의 생애가 이 짤막한 기사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몇 달이 지나 <신가정> 5월호에 ‘영원불멸의 명주(明珠) 고 최용신 양의 밟아온 업적의 길’이라는 탐방기사가 실렸다. 심훈의 장편소설 <상록수>가 9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연재되면서부터 최용신의 이름은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세월이 지나가면서 최용신에 대한 기억과 샘골강습소에 대한 관심도 시들어져 갔다. <상록수>의 채영신은 알아도 그 모델이 된 최용신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1939년 정월, <성서조선>의 주필이자 양정고보 교사 김교신(1901~1945)은 최용신의 생애를 전기로 남기기로 결정했다.
1939년 올해 정초에 동계 성서강습회로 우리 집에 모였을 때이다. 얘기가 고 최용신 양의 생애에 미친 일이 있었다. 그 귀한 생애의 토막토막을 들은 우리들은 그 일생을 상세하고 정확하게 기록하여 두는 것이 후세에 많은 유익을 전하는 일이 될 것이며, 또한 같은 시대 같은 땅에 살던 동포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의무를 절실히 느낀다는 데에 의견이 일치하였다.(김교신이 쓴 <최용신 소전> 머리말 중에서)
1939년 겨울, 김교신의 제자 류달영(1911~2004)이 지은 <최용신 소전>은 몇 달 만에 수 천부가 판매될 정도로 독자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1942년 봄, 일제는 <성서조선> 3월호에 한겨울 강추위를 견디고 살아난 연못 속 개구리의 강인한 생명력을 노래한 ‘조와’를 문제 삼아 글을 쓴 김교신과 200여명의 독자를 체포하고 12명을 구속시켰다. 감옥에 갇힌 12명 중에는 <최용신 소전>을 지은 류달영은 물론 책을 편찬할 때 후원한 유영모, 함석헌 등도 포함된다. 이때 <최용신 소전>도 압수되고 출판도 금지되었다.
최용신은 1909년 함경남도 원산(덕원)에서 최창희의 5남2년 중 넷째로 태어났다. 명사십리로 유명한 항구도시 원산은 1880년에 한국 최초의 근대학교인 원산학사가 설립되었고 1920년대에 비키니를 입었을 정도로 개방된 지역이었다. 최창희는 1927년 신간회가 결성되었을 때 덕원(원산)지회 부회장으로 활동했던 민족주의자였다.
5형제 모두 고등교육을 시켰을 정도로 집안형편도 넉넉했다. 최용신은 어릴 적에 천연두를 앓다가 생긴 곰보자국 때문에 가끔 마음의 상처를 받았으나 성격이 활달하고 공부를 잘 하는 야무진 학생이었다.
1928년 3월, 최용신은 우리나라 5대 명문 여자학교로 꼽히는 원산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했다. 이때 <조선일보>에 이 학교 졸업생 4명을 취재한 ‘새봄 맞아 교문을 나서는 재원들-원산 루씨학교의 특출한 네 규수’라는 기사에 최용신이 기고한 글이 실렸다.
…남녀 양성으로 이루어진 이 사회가 남성만의 활동과 노력만으로써 원만한 발전을 기대할 수 없음을 알 것이다. 여기에 교육 받은 여성들이 자진하여 자기들의 책임의 본분을 지고 분투한다면 비로소 완전한 사회가 건설될 줄로 믿는다.…농촌 여성의 향상은 우리들의 책임임을 알아야할 것이다. 중등교육을 받은 우리가 화려한 도시생활만 동경하고 안일의 처지만 꿈꾸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농촌으로 돌아가 문맹퇴치에 노력하려는가? 거듭 말하노니 우리는 농촌으로 달려가자! 손을 잡고 달려가자!
고등교육을 받은 여성들이 앞장서서 농촌에 봉사하고 양성평등의 사회를 건설하자는 담대한 주장이다. 최용신은 재학 중에 존경하며 따르던 교목 전희균 목사의 권유로 감리교 협성여자신학교(현 감신대학)에 진학하여 전영택, 정인보, 조병옥, 정경옥 같은 교수들에게 전문지식과 나라사랑의 길을 함께 배웠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 기도로 하루 일과를 시작했을 정도로 성실하고 신앙심이 깊은 학생이었으나 불의에 눈을 감지 못했다. 1931년, 최용신은 교장 케이블을 비롯한 선교사들의 인종우월주의와 독선적 학교운영에 반대하는 항의농성에 참여하여 징계를 받아 졸업 1년을 남겨 놓고 학업을 중단하게 되었다.
최용신의 제자들은 평생 스승의 말을 또렷이 기억했다. “너희는 우리나라의 보배다. 열심히 배우고 노력하면 큰 일꾼이 된다.” “너희는 훌륭한 사람이 되어 나라를 구하고 이 나라를 짊어질 재목이다.”
수업 후 아이들의 집을 찾아 간 최용신은 어머니에게 힘주어 말한다. “애는 자라서 크게 될 사람이니 지금은 힘 드시더라도 참고 이겨내시고 자랑으로 키우십시오.” 옆에서 선생님의 말을 들은 아이는 선생님의 말씀을 평생 잊지 않았다. 최용신이 아이들에게 쏟은 아낌없는 사랑과 정성에 어른들도 ‘감동’했다. 농사일 밖에 모르던 여인네들이나 할머니들도 강습소를 찾았다.
샘골강습소에 아이들이 몰려와 더 이상 학생들을 수용할 수 없었다. 최용신은 건축을 결심하고 마을 사람들에게 협조를 호소했다.
부인친목계인 ‘개미저축회’와 신간회 수원 지부의 간부로 활동했던 정미소 주인 염석주가 많은 돈을 기부하고 반월면의 부호 박용덕이 땅을 기증하여 공사를 시작했다. 이듬해 1월에 새 교사가 완성되자 학생수가 120명으로 늘어났다.
최용신은 보조교사와 함께 한글, 산술, 성경, 노래는 물론 재봉, 수예, 가사 같은 실생활에 필요한 기술도 가르쳤다. 방학이 되면 이웃마을을 돌며 농촌계몽에 나섰다. 1932년 3월, 최용신은 더 배우기 위해 약혼자 김학준이 있는 일본으로 떠났다. 고배여자신학교 사회산업학과에 입학한 최용신은 얼마 지나지 않아 각기병을 얻어 결국 6개월 만에 귀국길에 올라야했다.
최용신은 병원으로 실려 가면서도 샘골의 운명을 걱정했다. 바로 전해에 YWCA에서의 지원금이 중단되었다. 민족혼을 불어넣는 최용신의 교육을 방해하기 위해 일제가 압력을 넣었기 때문이다.
“천곡 강습소를 영원히 경영해 달라”는 최용신의 유언은 지켜졌다. 언니의 뒤를 이어 여동생 최용경이 샘골로 찾아와 교사로 활동하고 신문을 통해 사정을 알게 된 많은 청년학생들이 찾아왔다.
1962년에는 대학교수를 지낸 김학준이 샘골을 찾아와 학원 이사장을 맡아 농촌운동을 함께 하기로 했던 약속을 지켰다. 최용신의 관에 외투를 덮어주었던 김학준은 결혼한 몸이지만 아내의 동의를 얻어 약혼자 최용신 옆에 묻혔다.
최용신의 정신
샘골 아이들이 부르던 ‘강습소가’의 가사에 최용신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
반월성 황무지 골짜기로 / 따뜻한 햇볕은 찾아 오네 / 우리의 강습소는 조선의 빛 / 우리의 강습소는 조선의 빛
오늘은 이 땅에 씨 뿌리고 / 내일은 이 땅에 향내 뻗쳐 / 우리의 강습소는 조선의 싹 / 우리의 강습소는 조선의 싹
노랫말처럼 최용신은 식민지 조선 아이들의 가슴에 희망의 씨앗을 심었던 위대한 교육자였다. 그의 교육정신은 최근 새롭게 재해석되고 있다. 외국인 노동자가 가장 많은 안산을 국제도시로 성장시킬 비전을 최용신 정신에서 발견하자는 것이다. 최용신의 정신은 다문화시대를 예비하는 철학으로 재해석되고 있는 것이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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