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평섭 칼럼] 女性 장관 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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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20일이면 우리나라 여성장관 1호였고 중앙대학교의 설립자인 임영신(任永信) 박사 38주기를 맞는다. 그의 고향 충남 금산을 비롯 올해도 몇몇 관련 단체에서 조촐한 기념행사가 마련되고 있다.

 

독립운동가, 교육자, 정치인, 그리고 한때 친일논쟁까지 불러일으킨 그의 생애는 정말 드라마틱하다.

 

그는 먼저 구한말의 두터운 여성차별을 싸워야할 목표로 정했다. 여자는 학교에 가서도 안되고 정치에 관심을 가져서도 안되는 상황. 심지어 그 아버지는 일찍이 기독교를 받아들였음에도 딸을 학교에 보내는 걸 거부했다.

그래서 임영신이 처음으로 결단을 내린 것은 아버지를 상대로 단식 투쟁을 벌인 것이고, 마침내 전주에 있는 지금의 여자고등학교와 같은 기전학교에 입학을 하는데 성공한다.

 

기독교 계통의 여학교인데도 당시 학생들은 얼굴을 가리는 ‘쓰개치마’라는 것을 뒤집어 쓰고 다녀야 했다. 임영신은 이 역시 여성차별이라 생각하고 전교생을 움직여 ‘쓰개치마’ 거부운동을 벌였고 1916년에는 이 운동이 전국으로 확대되어 여학생들의 ‘쓰개치마’ 착용이 폐지되기에 이르렀다.

 

여성해방운동에 어느정도 자신감을 얻은 임영신은 그 다음 항일 독립운동으로 방향을 돌렸다. 조회때 일본 국가 안부르기, 교실에 걸려있는 일왕의 눈에 구멍내기, 그리고 마침내 31 운동에 가담하여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감옥에서 극심한 신체적 고통을 겪고 3년 6개월의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그때 그는 스스로 ‘나는 한국의 잔다르크가 되겠다’고 결심하고 1923년 독립운동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이승만 박사를 운명적으로 만나 독립운동 동지가 된다.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는 일, 미국 언론사에 일본을 규탄하는 글을 보내고 독립운동 조직을 확산하는 일에 몰두했다.

 

그가 얼마나 이승만박사와 호흡을 같이 했는가는 그의 호를 ‘승당(承當)’이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즉 ‘승(承)’은 이승만의 이름 가운데 자이고 ‘당(當)’은 이승만의 집이라는 뜻이다.

 

과연 그는 대한민국이 건국되자 초대 상공부장관이 되었다. 우리 역사에 여성장관 1호가 된 것이다. 

그때의 각료 명단에 여성인 그의 이름이 들어가자 세상이 발칵 뒤집히다시피 충격을 주었다. 지금은 여성 대통령까지 나왔지만 그때는 그랬다. 장관이 되기 앞서 임영신은 해방과 함께 ‘대한여자국민당’을 창당, 총재가 되어 이승만의 건국 작업을 도왔는데 이 역시 우리나라 여성 당수 1호가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의 탁월한 영어 실력과 정치 수완으로 UN에 파견돼 대한민국을 승인받는다든지 625때 UN의 지원을 받는 등 눈부신 활동을 했다. 그러나 일제 말기 귀국하여 교육사업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학교를 지키기 위한 일제와의 어쩔 수 없는 제한된 협력이 친일로 매도되기도 했다.

 

또한 결혼의 실패, 이승만대통령의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와의 갈등, 두 번에 걸친 부통령 출마 실패, 상공부 장관 시절 독직 혐의로 수사를 받고 결국 무죄로 끝났지만 ‘여성 임영신’이 겪어야 했던 아픈 상처도 많았다. 이런 것을은 어쩔 수 없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상처들이어서 연민을 느끼게 한다.

 

임영신, 그는 자신의 결심대로 ‘한국의 잔다르크’가 되지 못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거기에 가까이 가려고 노력한 건 분명한 것 같다. 그의 38주기를 맞아 느끼는 소회다.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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