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대] 혼용무도

이연섭 논설위원 yslee@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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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신문은 연말이면 ‘올해의 사자성어’를 발표한다. 지난 한 해 우리 사회의 세태를 풍자하는 사자성어는 촌철살인의 네 글자로 국민들의 공감을 얻고있다. 

2008년에는 ‘병을 숨기면서 의사에게 보이지 않는다’는 뜻의 ‘호질기의(護疾忌醫)’가 선정됐다. 괴담을 근거로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시위에 어설프게 대응한 정부 비판 여론이 거센 해였다.

 

천안함 폭침, 민간인 불법사찰이 있었던 2010년의 사자성어는 ‘장두노미(藏頭露尾ㆍ머리는 겨우 숨겼지만 꼬리가 드러나 보임)’였다. 국민을 설득하는 대신, 진실을 감추려 하는 정부를 비판한 말이다. 박근혜 정부 1년차인 2013년에는 ‘순리를 거슬러 행동한다’는 뜻인 ‘도행역시(倒行逆施)’가 선정됐다.

2014년의 사자성어는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한다’는 뜻의 ‘지록위마(指鹿爲馬)’가 꼽혔다. 세월호 참사, 정윤회 국정개입 사건 등 온갖 거짓이 진실인양 우리 사회를 강타했던 해였다.

 

교수신문은 2015년 한해를 되돌아보는 사자성어로 ‘혼용무도(昏庸無道)’를 꼽았다. ‘마치 암흑에 뒤덮인 것처럼 온통 어지럽고 무도하다’는 뜻이다. 어리석고 무능한 군주를 가리키는 혼군(昏君)과 용군(庸君)을 함께 이르는 ‘혼용’과, 세상이 어지러워 도리가 제대로 행해지지 않고 있음을 묘사한 ‘논어’의 ‘천하무도(天下無道)’ 가운데 ‘무도’를 더한 표현이다. 어리석고 무능한 군주의 실정으로 나라 전체의 예법과 도의가 무너져버린 상태를 의미하고 있다.

 

역사가들은 ‘혼용무도’의 표본으로 중국 진(秦)나라의 두번째 황제 호해를 든다. 기원전 210년 진시황이 지방에 순행갔다가 갑자기 병사하자 환관 조고는 유서를 조작해 적장자가 아닌 호해를 후계자로 옹립하고 뒤에서 국정을 농단했다. 호해는 환관 조고의 농간에 귀가 멀어 실정과 폭정을 거듭하다가 즉위 4년 만에 반란군의 겁박에 의해 자결하고 진은 멸망하게 된다.

 

‘혼용무도’를 추천한 이승환 고려대 교수는 “연초 메르스 사태로 온 나라의 민심이 흉흉했으나 정부는 이를 통제하지 못하고 무능함을 보여줬다. 중반에는 여당 원내대표에 대한 청와대의 사퇴 압력으로 삼권분립과 의회주의 원칙이 크게 훼손됐고, 후반기에 들어선 역사교과서 국정화 논란으로 국력의 낭비가 초래됐다”고 밝혔다.

 

혼용무도의 사회, 우리 국민들은 올 한해 얼마나 힘들었을까. 토닥토닥, 수고했다고 스스로를 격려하자. 

이연섭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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