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역사, 큰 사람 품은 ‘광복의 門’… 큰 세상을 열다
갑오년에 제대로 가지 못하면 을미년에 을미적 거리다가 결국 병신년에 아무것도 못하게 된다는 이야기였다. 정말 백성들의 서글픈 노래는 끝내 예언이 되고 말았다.
갑오년 그 높던 반봉건의 기세는 조정의 무능과 청나라와 일본 등 외세의 침입으로 무너지고 끝내 을미년에 청일전쟁에서 일본의 완승으로 끝나며 국모가 시해되는 비극을 맞이하게 된다.
그 결과 다음해인 병신년에 우리의 주권은 대부분 잃고 서서히 몰락해가고 있었다. 그래서 이 노래가 두려웠다. 이 노래가 이 땅에서 불리다 사라진지 120년 후인 올해 을미년을 우리는 감격스런 해로 맞이했다. 한번 들여다보자! 올해가 우리 민족에게 얼마나 귀한 을미년이었던가.
1945년은 제국주의 일본에 의해 강점당했던 식민국가의 부당함을 떨쳐버리고 광복(光復)한 해였다.
우리 역사에서 이 보다 더 귀중하고 가치있는 해가 어디 있겠는가.
이 광복의 해로부터 70년이 지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해가 바로 올해 을미년이었다.
과거 120년전 을미적 을미적 거리다가 병신되던 그러한 무능하고 나약했던 을미년이 아닌 전 세계를 이끌어가는 대한민국으로서의 을미년이다.
그래서 올해 을미년 새해를 맞이할 때 우리는 그 어떤 시절보다 감격스러웠다. 그간 120년의 서러움을 극복하고 미래에 대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경기일보는 을미년 120년, 광복 70주년의 역사적 의미를 기억하기 위한 장대한 기획을 했다.
다름 아닌 120년 전 척양척왜(斥洋斥倭)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기치를 들고 목숨을 건 투쟁을 했던 이들로부터 1945년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온갖 감언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의지를 지키며 조국을 위해 투쟁을 아끼지 않은 경기지역의 항일독립운동가들을 조명하는 기획이었다. 광복 70주년을 기념하는 대장정이었다.
이 기획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경기지역의 역사문화적 고유성 때문이기도 하다. 경기지역은 한반도의 중심부에 있으면서 한강과 서해를 함께 아우르고 있다. 북쪽으로 예성강과 임진강이 있으며 남쪽으로 너른 평야가 존재하는 한반도의 단연 중심이었다.
이러한 지리적 요건은 수많은 사람들을 모으고 그 과정에서 고유한 문화를 창조했다. 그것은 소통과 화합의 공간이자 문화 다양성을 수용하는 깊은 의미가 있는 것이다. 우리 역사상 최초의 선사유적지가 있는 것도, 수많은 외세의 침입에 결연히 맞서 나라를 지킨 힘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조선시대 다양한 학문과 사상이 경기도에서 펼쳐지면서도 그 사상들을 통합하고 발전해 경기지역만의 고유한 실학사상을 만들어 낸 것도 바로 경기도만이 가지고 있는 문화의 포용성 때문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문화적 전통성이 바로 120년 전 을미년부터 오늘 을미년까지 우리 역사 되찾기와 발전의 기반이 된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실학(實學)과 동학(東學)이다. 경기지역이 내세울 수 있는 세계적 사상이 바로 실학이었다. 실질적인 것을 섬기고(實事), 올바른 것을 구한다(求是)는 실학은 백성들의 실질적인 삶을 보다 나은 단계로 발전시키고자 했다.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권리를 기본으로 해 기존의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적 질서 체제를 극복하고자 했다. 실학의 기반위에 한단계 발전한 동학이 탄생됐다. 인간을 하늘과 동일한 존재로 보는 인내천(人乃天)과 사람을 하늘처럼 섬기자는(事人如天) 사상은 세계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인권 사상이었다.
이처럼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존중의 가지고 있는 사상의 발전이 경기도에서 있었다. 사상의 발전은 당연히 그 실천자들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경기도 곳곳에 오늘 우리가 밝히고자 하는 실천자들이 곳곳에 존재하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이가 바로 해월 최시형이다.
우리 기획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진 인물 중의 한분이 바로 해월 선생이었다. 동학의 창시자 수운 최제우 선생이 경상도 대구 감영의 차디찬 사형장에서 처연히 목이 잘린 후 해월은 우리 산하 곳곳을 다니며 동학을 퍼뜨렸다.
그리고 그는 이후 진행될 외세의 침입에 결연히 항의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그의 생각은 온전히 갑오년으로 이어졌고 그 엄청났던 민초들의 함성을 만들어냈다.
그래서 처음으로 노비제도의 전면적인 혁파와 청상과부들의 재가가 실시됐으며 모든 백성들이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의 책임자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인물을 직접 투표에 의해 뽑을 수 있는 근대 민주주의 제도와 동일한 집강소를 만들었다.
너무도 놀라운 이야기다. 이러한 세계사적인 일을 우리가 우리만의 ‘사건’으로 축소하고 있다는 것이 더 놀라운 일이기기는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이러한 세계사적인 경험을 하게 만든 주인공이 바로 해월이었고 그가 바로 여주 천덕산 중턱에서 평화의 잠자리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을미년 광복 70주년의 기쁨의 해를 맞이하기 위해 조명돼야 할 대표적 인물이 바로 새로운 사상과 시대를 열어가고 항일독립운동의 기반을 마련한 해월이었음을 이 기획을 통해 조명된 것이다.
이 기획을 통해 정리된 것은 여성 항일운동가들의 조명이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항일독립운동사는 바로 남성 중심의 운동이었다.
여성들의 독립운동은 올바르게 밝혀내지 못했다. 그저 여성들의 독립운동은 남성들의 운동에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것 뿐으로 인식됐다. 이러한 잘못된 사고는 광복된 지 70년이 지나도록 우리들의 뇌리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우리 역사에서 반을 차지하고 있는 여성들에 대한 무참한 대우였다.
고종황제의 붕어 소식을 듣고 모든 가무를 중단하고 나무로 만든 비녀를 꽂고 소복을 입은 채 덕수궁으로 올라가 곡을 했던 기녀 김향화, 3.1 만세투쟁 당시 기녀의 신분으로 태극기를 들고 나섰던 그녀는 일본인들이 만든 ‘조선미인보감’에 수록될 정도로 조선 제일의 미인이었다. 그런 그녀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민족과 국가에 대한 애정을 보이지 않았다면 그녀는 엄청난 재물을 얻어 호의호식 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하찮은 재물보다 소중한 조국을 되찾는 명예를 선택했고 이러한 선택은 그녀를 감옥으로 보내야 했다. 류관순 열사와 같은 이화고녀 학생이던 이선경도 나라에 대한 독립의지가 없이 개인의 안락한 삶을 선택했다면 몸을 편안하게 하는 삶을 살았을 텐데 그러한 삶은 단호히 거부하였기 때문에 끝내 죽음의 길로 나갔던 것이다.
이러한 여인이 어찌 한 두명이겠는가. 이처럼 자신을 내던지고 조국을 위해 목숨을 던진 여인들이 이 땅 경기도에 얼마나 가득했겠는가. 이처럼 위대한 여성독립운동가들을 모두 찾아내지 못한 것이 끝내 아쉽기만 할 뿐이다.
이 기획을 통해 우리가 깊이 생각하고 실천하려 한 것은 바로 이데올로기의 극복이었다. 70년전 광복 이후 한반도는 외세에 의한 분단이 추진됐다. 그 결과 1948년 분단은 공식화되고 오늘날까지 분단은 지속되고 있다. 남과 북의 민초들이 어찌 원수일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우리들은 분단을 고착화해 자신들만의 이익을 얻고자 하는 이들을 보지 못하고 그저 남북 전체의 이데올로기만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원수처럼 생각하고 있다.
이것이 비극이 아니면 무엇이 비극이겠는가. 이러한 비극 때문에 120년 전부터 70년 전까지 항일운동을 했던 사회주의자 혹은 무정부주의자들에 대한 생애와 명예를 회복해주지 못했다. 그들이 당시 그와 같은 이데올로기를 선택했던 것은 그것이 보다 효율적인 독립운동이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 생각을 지닌 인물들을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이데올로기와 다르다고 그들의 삶을 밝혀주지 않는 다면 이는 경기지역의 문화적 고유성은 문화다양성과 포용성을 포기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민족지도자 몽양 여운형선생부터 문학가 박승극에 이르기까지 경기지역의 사회주의 경향의 항일독립운동가들의 생애도 다루었다. 이는 미래의 남북소통을 위한 한 걸음이기도 했다.
올해 우리는 많은 것을 기대했었다. 광복 70주년을 기회로 남북이 서로 소통하고 평화를 정착하는 원년으로 바랐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 종전으로 제국주의 국가로부터 식민지배에서 벗어난 아시아의 대부분의 국가들과 연대해 아시아 평화의 원년을 맞이하기를 바랐다. 더불어 1965년 한일간의 협정을 통해 국교정상화 50주년을 맞아 보다 발전적인 한일관계를 원했다. 하지만 이러한 우리들의 염원이 대부분 원만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일관계는 더욱 악화되고 우리민족의 피가 고스란히 배어있는 악몽과도 같은 지옥도가 일본의 근대산업유산이라는 미명으로 세계유산으로 등재되며 아시아 국가의 평화는 요원해졌고 남북관계 역시 이산가족 상봉만이 1회 있었을 뿐 금강산도 개성도 열리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올해 을미년의 의미가 훼손되어서는 안된다.
경기일보의 남북화해의 의지를 기반으로 내년 병신년에는 새로운 한반도의 미래가 열려져야 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염원하는 것이고 민족의 미래는 바로 여기에 달려 있다. 그 힘의 원동력이 바로 경기도에 있는 것이다. 경기인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김산(홍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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