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종교] 무엇을 바꿀 것인가

도문.jpg
오늘도 연숙이 엄마는 귤을 따러 갔다. 비 온 날 하루 반짝 얼굴을 내밀고는 도대체 나타나지 않는다. 제주도 감귤 밭의 귤을 다 따야 오려나 보다.

 

얼마 전 제주도에 있는 도반에게 연락이 왔다. 주지스님이 서울에서 입원하셨으니 자기가 내려 올 때 까지만 절에 있어 달라 부탁했다.

급한데 사람을 구할 수가 없단다. “좀 도와줘” 라는 말과 함께 비행기 타야한다며 거절 못하게 전화를 탁 끊어버린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엉겁결에 일어난 일이다. 난감했다. 그니도 사정이 급하지만 나도 맘 편히 내려갈 상황이 아니다. 남의 어려움에 매몰차지 못한 나는 하는 수 없이 짐을 꾸려 제주도로 내려갔다.

 

절에 도착하니 절을 지키고 있어야 할 공양주가 안보인다. 귤 따러 갔단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헛웃음이 났다. 도착한 날부터 남의 부엌에서 밥을 챙겨먹어야 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비가 온 날, 드디어 공양주가 왔다. 그니가 연숙이 엄마다.

 

국도 끓이고 이것 저것 밑반찬도 꺼내놓은 것이 제법 밥상이 그럴듯하다. 한창 수확 철인데 비가 와서 당도도 떨어지고 귤도 딸 수가 없다며 계속 투덜거린다. 다음날, 날이 개자 연숙엄마는 새벽같이 밥상을 차려놓고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또 귤 밭으로 달려갔다. 

그래도 혼자 있을 때는 내 끼니만 챙겨 먹으면 되니 별 불만이 없었다. 수확 철인데 마음이 오죽 급하면 그러겠나 싶었다. 하지만 일주일이 지나고 주지스님이 퇴원해서 절에 돌아오시니 사정이 달라졌다. 이만저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도반은 학교일이 끝나지 않아 잘 지내라는 말과 함께 다시 서울로 가버렸다. 새벽부터 기도하랴, 편찮으신 어른스님 세끼 공양 준비하랴, 잠깐이라도 살펴드리랴 하루가 어찌 가는지 모를 지경이다. 3시에 일어나 새벽기도하고 돌아서면 밥해야 하고, 잠시 숨 돌리고 나면 또 기도시간이고, 마치면 또 점심해야하고, 치우고 잠시 쉬고 소화시키기 위해 산책 한 바퀴 돌고나면 또 저녁 공양과 기도시간이 돌아오는 게 아닌가.

 

처음 며칠간은 할 만하더니 날이 갈수록 부담이 되기 시작했다. 주지스님도 내게 미안해서 연숙엄마에게 빨리 오라고 전화해 보지만 소용이 없다. 하루 10시간 정도 앉아 있는 생활을 10년 가까이 하다 보니 몸에 근력이 거의 없다. 

그런데다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 점심 한 끼만 제대로 먹는데, 편찮으신 어른 혼자 드시게 할 수 없어서 세끼를 같이 챙겨 먹으니 속이 부담되는지 계속 배도 아프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방에 들어오면 시체마냥 뻗어버린다. 

나는 원래 어깨가 취약해서 기도를 잘 맡아하지 않는데, 안치던 목탁을 치니 어깨도 내려앉는다. 저녁마다 누워서 끙끙 앓는다. 신음소리가 절로 난다. 마음과는 달리 몸은 야속하게도 체력이 바닥난 것 같다. 게다가 오늘 연숙이 엄마가 남의 밭에 품팔이 갔단 말도 들었다. 갈수록 태산이다.

 

처음 너그러웠던 마음과는 달리 사태가 이쯤 되니 슬그머니 화가 난다. ‘아니, 도대체 너무 하지 않나. 직장인 절을 팽개치고 자기 밭의 귤을 따는 것도 모자라 남의 밭에 품을 팔러 가다니!’ 생각할수록 기가 막힌다. 

이월에 중요한 시험이 있어 책도 봐야 하는데, 책상 위에 펼쳐 진 채로 먼지만 쌓여간다. 한참을 누워서 속으로 궁싯거리다가 마음을 비우기로 했다. 속을 끓인다 한들 서로에게 무슨 이득이 있으랴.

 

불교 수행은 나를 힘들게 하는 세상이나 대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을 대하는 내 마음과 태도를 바꾸는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를 옭아매는 마음의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보름이 지난 어느 날 연숙이 엄마가 귤을 가득 싣고 웃으면서 나타났다. 방금 따온 것이라며 맛을 보라고 하나를 내민다. 귤이 달다. 저 멀리 눈 덮인 한라산이 고운 자태를 드러낸다.

 

도문 스님 수원 아리담문화원 지도법사

© 경기일보(www.kyeonggi.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