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년 ‘시화호 지킴이’
올해로 20여년 째 시화호 일대에서 환경보호 활동을 해온 그는 시화호 주변의 새와 꽃, 동물 등의 사진과 영상을 기록, 간척사업 이후 시화호 생태를 하루도 빠짐없이 기록하고, 고발했다.
이 같은 공로로 지난 2002년 환경기자클럽이 선정한 ‘올해의 환경인상’ 수상, 2011년 환경보호 공로 대통령 표창을 수상하는 등 언론의 집중조명 받았다. 자연, 그 본연의 가치에 주목하며 인간과의 공존을 고민하고 있는 그를 지난 7일, 안산갈대습지공원 작업실에서 만났다.
‘인간은 자연과 함께 공생을 하며 살아왔다. 좁은 공간을 빌려 쓴 만큼 환경을 보존할 수 있는 노력을….’ 최종인씨가 기자에게 건넨 명함에 적힌 글귀다. 자세히 보니, 일반적인 명함도 아니다. A4용지를 명함 사이즈로 잘게 잘라 만든 허술하기 짝이 없는 종이명함.
받고 나니 당황스러웠다. 단연코 처음 받아보는 종류의 명함. 연유를 물었다. 자원 낭비라는 말로 되돌아온다. 타인에 자신을 알리고 기억시키는 목적이라면 이것으로도 충분하다는 의미다. 20여 년간 ‘시화호 지킴이’이자 생태사진작가로 활동하며 터득한 그만의 철학인 셈이었다.
지금에야 그와 시화호를 떼놓고 생각할 수 없지만, 애초부터 관심을 뒀던 것은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생태’와는 거리가 먼 전기기술자 출신이다. 1964년 서울의 한 전기 관련 업체에 서 기술자로 18년을 보냈다. 퇴사한 후에는 전기 설비 분야에 사업을 하기도 했다.
시화호도 그 때 눈에 들어왔다. 공사장 일용직으로 일하며 어렵게 생활을 꾸려나가던 그는 일감이 없는 날이면 지금은 없는 ‘사리포구’를 찾아다니며 낚시를 했다. 그에게 시화호는 마음의 안식처였다.
불행하게도 그마저도 오래가지 못했다. 1991년 시화호에 대규모 방조제 공사가 진행되면서 급변했다. 바닷물이 눈에 띄게 줄고, 갯벌이 드러났다. 어패류도 하나 둘 사라졌다. 어패류를 먹고 살던 철새도, 시화호 인근에 집을 짓고 살던 동물도 모두 떠났다. 심지어 집단 폐사한 물고기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슬픔과 분노가 교차했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됐다. 무엇이, 이 작은 생명을 앗아가는 지 확인해야 했다. ‘최악의 환경재앙’은 그렇게 시작됐다. 이때부터 그의 손에도 낚시대 대신, 카메라가 들렸다. 시화호 이곳저곳을 제 집 드나들 듯 오갔다. ‘죽음의 호수’를 알리는 일은 온전히 그의 몫이었다.
떼죽음을 당해 허옇게 떠오르는 물고기며, 조개, 새들 사진을 찍고, 동영상을 촬영했다. 현장의 충격은 고스란히 외부로 전달됐다. 환경단체는 물론 방송과 신문에서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절박함은 기적을 만들었다. 시화호 오염의 실태가 대대적으로 보도되자 많은 사람들의 지지와 응원이 이어졌다. 결국 정부는 더 이상의 사업을 진행할 수 없다는 판단에 1998년 시화호 담수화 사업을 백지화한다. 바닷물을 막은 거대한 간척지에 농업·산업단지를 조성하고, 담수호에서 용수를 공급하겠다는 원대한 개발논리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시화 방조제 수문이 열리면서 다시 바닷물이 시화호로 흘러들었다. 시화호가 새로운 생명의 기운을 얻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이때부터 시화호 생태에도 거짓말 같은 변화가 시작됐다. 부활을 알린 것은 다름 아닌 새들이었다. 오랫동안 자취를 감췄던 갈매기들이 시화호에 날아 들었다.
“일반인들이 봤을 때, 새가 찾아든 게 ‘무슨 부활의 징조야’라고 반문할 수 있지만, 사실 커다란 의미를 내포합니다. 갯벌이 살아나고 있다는 반증이니까요. 갯벌 속에 새들의 먹이가 될 만한 조개나 갯지렁이들이 자생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졌다는 결정적 징후기도 하죠.”
공직에 들어와 안정적으로 활동을 벌이게 되면서 더욱 분주해졌다. 매일 어떤 새가 시화호를 찾아오는지, 하나하나 헤아리는 일은 이제 습관이 됐다. 도로에 죽은 동물이 있다는 신고가 들어오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한달음에 달려가 시체를 수습한다.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지경이다. 그럼에도 그가 거르지 않는 일이 있다. 본연의 소임이라 여기는 ‘기록’이다. 때문에 안산갈대습지공원 내 최 씨의 작업실에는 다양한 구경의 렌즈는 물론, 동영상 촬영장비, 액세서리들이 한쪽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다.
“생태연구를 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끊임없는 기록입니다. 이게 결국, 시화호가 가치를 가지고, 보존될 수 있게 하는 증거이고 근겁니다. 때문에 작은 것 하나도 허투루 할 수 없죠.”
이렇게 모인 자료는 방대함 그 자체다. 웬만한 박물관 수장고를 채우고도 남는다. 아직 그 수를 다 헤아리지는 못했지만, 슬라이드 필름만도 5만 통에 육박한다. 사진 수로 쳐도 수십만 장을 가뿐히 넘고도 남는 분량이다.
그 뿐인가. 60분짜리 DV 테이프 1천 개, 5TB 분량의 디지털 영상, 또 그만큼의 디지털 사진도 보유하고 있다. 한 개인이 어떤 일에 올곧이 투신하지 않고서는 이룰 수 없는 성과이자 업적인 셈이다.
최근에 그에게 또 다른 바람이 생겼다. 안산 갈대습지공원 103만7천500㎡와 내달 습지로 지정될 대송단지 인근 자연습지 440만㎡가 ‘람사르 습지’에 등재되는 것이다. 이로서 법적인 근거를 가지고 시화호가 보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는 현재 21개의 습지가 람사르 습지로 등록돼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습지의 보존가치가 인정받고 있는 상황에서 시화호 인근 습지들도 등재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시 차원에서 등재를 위한 지원을 아끼지 않지만, 무엇보다 많은 이들의 관심이 필요합니다”
글 = 박광수기자
사진 = 김시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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