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세 침입 대비한 전략적 요새… 국가 운명 좌우한 경기도 山城
우리 역사상 최고의 탑에 대해 엄청난 격차의 글들이 있었지만 고유섭의 글은 특별했다. 그 글은 다보탑의 아름다움에 대한 예찬이 아닌 다보탑을 만든 신라 장인에 대한 예찬이었다.
돌을 밀가루 반죽처럼 다루는 신라 장인을 통해 우리나라 탑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했던 것이다. 고유섭 선생의 생각대로 우리나라 옛 선조들은 전국 방방곡곡 어디에도 존재하는 화강암을 밀가루 반죽 다루듯 했다.
그러한 장인들의 기술로 만들어진 대표적인 유산이 바로 산성(山城)이었다. 왜냐하면 삼국시대 이래 우리나라 산성은 대부분 돌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선 세종대 명 재상이었던 양성지는 조선을 ‘산성의 나라’라고 하기도 했다. 이는 단군 조선의 개국 이래 수많은 외세의 침략을 험준한 산성으로 막은 역사적 자부심을 일컫는 말이었다.
실제 한반도에는 고대부터 조선후기에 이르기까지 1천500여개의 산성이 존재했다. 이러한 산성은 외세와의 침입뿐만 아니라 삼국시대의 쟁패, 그리고 후삼국 및 고려 조선시대 내란과 민란의 격전지로서 역사의 숨결이 그대로 배었다.
산성을 이해하는 것은 어쩌면 우리 역사 전반을 이해하는 것일 수 있다. 산성에 담겨 있는 수많은 역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단지 성곽 자체로서의 의미만이 아니라 성곽에 담겨 있는 진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바로 경기지역이 한반도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경기지역은 우리 산하의 젖줄이자 심장인 예성강, 임진강, 한강 등이 흐르고 있고 백두대간의 중심인 한북정맥, 한남정맥, 한남금북정맥 등이 이 강줄기들을 따라 어깨동무를 하며 끊임없이 이어져 서해에 이르고 있다.
이처럼 한반도에서 중요한 지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경기지역은 당연히 국가의 안위를 보호하는 산성을 쌓을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지리적 요건으로 우리 역사상 중요한 전쟁의 대부분이 경기도의 산성에서 나타났다. 물론 외세와의 전쟁은 당연히 북으로는 요동 일대의 송화강과 만주일대와 한반도의 접경인 압록강과 남으로 부산 일대에서 시작했다.
남쪽에서 올라오는 외적은 당연히 일본이었고, 북쪽의 압록강을 건넌 외적은 중국 한족(漢族)의 여러 국가들과 한족이 아닌 오랑캐라 불린 여진족, 거란족, 몽골족 등이 대부분이었다. 거대한 강국들의 외침은 국경을 넘어 침입해 들어와도 실제 국가의 운명이 결정되는 가장 중요한 전쟁의 전투는 경기 일대에서 대부분 치루어졌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경기(京畿)’라는 말은 사실 천자(天子)의 직접 통치지역을 뜻하는 단어다. 한나라 고조 유방이 천하를 통일하고 중원을 비롯한 중국 대륙을 통치함에 있어 제후들을 임명해 다스렸다. 이 중 수도 장안을 중심으로 천리나 되는 지역을 자신의 통치 영역으로 선포함으로써 ‘경기’는 태동됐다. 즉 역사적으로 경기는 그 나라의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의 가장 중요한 지역이었다.
따라서 국내외 모든 세력들은 한반도 내에서 경기지역을 장악하기 위해 끊임없이 도전해왔고 이에 반해 이 땅을 살아갔던 이들은 이곳을 지키기 위해 자신들의 모든 것을 다 내던졌다. 결국 경기지역은 5천년의 한반도 역사에 있어 역사의 운명을 전환시켰던 수많은 전쟁들의 소용돌이에 빠졌고 이를 극복해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중심지였다.
동아시아에서 산성은 대체적으로 조선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은 평지에 주로 성곽을 건설해 도시 방어와 전쟁을 했다. 그래서 일본에서 산성을 본다는 것은 극히 드문일이다. 동아시아의 핵심 국가인 중국 역시 우리처럼 산성이 흔치 않다.
그런데 왜 우리나라는 같은 한자문화권이자 동아시아의 다른 국가들과 달리 이처럼 산성이 많은 이유가 무엇일까? 그 이유는 바로 땅에 있다. 즉 우리나라 산천에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산(山)과 함께 어우러진 나라이다.
전 세계에 우리나라 처럼 산이 많은 나라는 것의 없다. 국토 전체의 70%가 산으로 이뤄진 나라이기에 주요한 도시와 방어시설이 산에 만들어졌다. 고구려 첫 번째 도읍을 산성인 오녀산성으로 정한 것만 보아도 우리 선조들이 얼마나 산과 더불어 삶을 영위했는지를
알 수 있다. 백제의 도읍 역시 하남 위례성으로 현재의 이성산성으로 추정되고 있다. 신라의 수도였던 서라벌의 궁성인 월성(月城) 역시 산성이었다. 이처럼 우리 민족은 산성에서 국가를 태동시켰고 이곳에서 국가를 운영했다.
산성에 도읍과 궁성을 둔 것은 안전성을 두고자 한 것이 가장 큰 요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권위를 위해서이기도 했다. 산 정상부에 있는 궁성의 모습은 산 아래 있는 백성들에게 참으로 다가설 수 없는 위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위엄의 바탕에는 바로 우리 민족의 산에 대한 신비감이 함께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은 산을 두려워하며 존경했다. 그리고 우리의 생명이 산으로부터 출발되었음을 부인하지 않았다. 그래서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산에 대한 숭배는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전 세계의 불교 사찰중에서 사찰안에 산신각이 있는 나라는 오직 우리나라 밖에 없다.
이는 외래로부터 전래된 불교문화와 우리 전통의 산악 신앙의 결합 때문이다. 외래의 고등 종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와도 우리 민족의 고유문화인 산악 숭배사상을 없앨 수는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산성은 세계적으로 독특한 문화유산으로 평가를 받는 것이고, 이의 결과로 경기지역의 대표적인 산성인 남한산성이 2014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이다.
고대로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산성은 외세로부터 백성들을 보호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 우리나라는 침략을 하지 않는 민족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외세가 쳐들어오면 반드시 응징을 하고 우리의 국경 밖으로 몰아낸다. 우리 역사상 1천여회의 전쟁사가 증명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힘이 바로 산성에 있었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청야입보(淸野入堡)’의 전술을 가지고 있었다.
외적들이 쳐들어오면 들판을 깨끗이 비우고 산성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즉 전쟁이 나면 주요 도시의 백성들은 자신들의 집안에 있는 식량만이 아니라 들판에서 농사짓는 곡식들까지 모조리 베어서 산성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산성안에서 오랫동안 버틸 식량을 비축하고 외적들과 대치하는 것이 바로 우리 고유의 전술이었다.
외적들이 우리나라를 침략할 시 가져온 식량이 바닥이 나면 그들은 더 이상 우리와 전쟁할 수 없었다. 먹을 것이 없는데 어찌 전쟁을 지속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산성에서 장기 항전하는 전략과 전술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법(戰法)이었다.
특히 남한산성과 북한산성 그리고 덕양산성과 오산의 독산성을 수도 방어만이 아닌 국가 전체의 운명을 담당하기 위해 만들어진 산성이었다.
더불어 경기지역의 산성은 전쟁으로부터 우리 백성들의 삶을 지키는 것만이 아니라 평화를 지켜주는 안식처였다. 그래서 경기지역 사람들은 ‘무(武)’란 ‘지과(止戈)’, 즉 창[戈]을 그치게[止]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평화를 위해 산성 지키기에 온 힘을 기울였다.
경기도가 한반도의 중심에 있듯이 경기도내의 산성은 한반도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역사적 전투와 삶의 터전으로 장식됐다. 이에 경기도 산성 시리즈 연재를 통해 경기도의 정체성과 문화적 공감성, 그리고 자주적 역사를 이루고자 했던 선현들의 숨결을 느꼈으면 한다.
김산(홍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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