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미사변후 경기 의병 근거지로 城內 마을서 3·1 만세운동 전개
역사적 고증 통해 재평가 해야
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 제공
1636년 만주족의 청(淸)이 조선을 침략하자 국왕 인조와 조선 조정은 남한산성으로 피신했고, 혹독한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도 결사적으로 항전했지만 결국 치욕적인 항복을 하고 말았다.
이 같은 역사적 아픔을 안고 있는 남한산성이 2014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지만, 이 곳이 의병활동과 3·1운동의 중심지였다는 것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이에 수많은 항일투쟁 운동이 벌어졌던 남한산성에 대한 역사적 연구와 고증을 통해 재평가를 해야한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지난 1895년 10월8일, 일제와 친일내각이 명성황후를 잔혹하게 시해한 ‘을미사변’이 발생한 그해 11월 단발령이 공표돼 고종황제의 단발을 강제 시행하는 만행이 벌어진다. 이 같은 일제 만행에 반발한 경기 유생들이 이천에 모여 의병 활동에 뛰어든다. 이들은 총 900여명의 의병을 모아 경기도 연합의병진 ‘이천수창의소’를 만들게 된다.
이들은 1896년 1월 일본군 수비대와 전투에서 승리한 이후, 수천명의 의병과 합세해 먼저 남한산성을 점거하고 있던 심진원 부대와 합류했다. 이들은 세력을 규합해 서울진공계획을 수립하지만, 1896년 3월 의병부대 지휘관이 관군의 꼬임에 빠져 남한산성의 성문을 열어주면서 끝내 무산된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후 광주 일대에서는 ‘중기일병’인 의병이 또다시 일어나고, 1907년 고종이 강제 퇴위 당하자 이에 반대하는 의병 세력이 남한산성 일대에서 봉기하게 된다. 하지만 일본에 의해 이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은 남한산성에 산재돼 있는 사찰들을 의병활동의 거점으로 보고, 9개 사찰 가운데 8개 사찰을 폭파해 소실시켰다. 당시 소실된 사찰들은 2000년대 초부터 복원작업 중이다.
일제강점기가 시작된 후 1919년 3월1일 전국 곳곳에서 만세운동이 벌어지자 남한산성 일대도 만세 운동이 펼쳐졌다. 광주군의 3·1 만세운동은 중대면 송파 일대에서 시작돼 남한산성 마을을 중심으로 전개됐다.
한국독립운동사를 전공한 김명섭 박사는 “일제강점기 때 남한산성 일대 주민들을 ‘한국의 모스크바’로 부르는 등 항일 정서가 상당히 강했다”며 “남한산성은 일제에 의해 왜곡되고 훼손된 마을 등을 되찾고자 하는, 항일 정신이 남아 있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였다”고 밝혔다.
조두원 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 유산활용팀 책임연구원은 “남한산성은 ‘삼전도 굴욕’ 등 역사의 한 중심지였고 곳곳에 항일운동의 자취가 남아있다”면서 “아직까지 고증된 것이 많지 않고 기록 자체가 거의 없어 국가적으로 연구가 꼭 필요한 곳”이라고 강조했다.
강현숙 정민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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