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평섭 칼럼] 김만중의 유배지 ‘노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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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 신분이야 어쨌든 여인으로서 완숙한 장희빈에 비해 인현왕후는 갓 14세의 어린 소녀였다. 그러니 숙종 임금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는 장희빈에게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승승장구 벼슬길에 오르던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은 서인(西人)의 영수이던 우암 송시열과 같은 정치적 노선에 있으면서 숙종 임금과 장희빈 관계에 시비를 걸게 되고 마침내 평안도 선천으로 1차 유배를 가게 된다. 이때가 1687년 숙종 13년.

 

그의 유배형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1689년 2월, 지금의 경상남도 남해의 외딴 섬 노도(櫓島)로 귀양을 가야만 했다. 그 유서 깊은 유배지 남해 노도를 지난 주 그의 광산 김씨 후손들 그리고 국문학을 하는 교수 등과 함께 찾았다.

 

말이 유배지일 뿐 해상국립공원답게 바다와 섬, 그리고 하늘까지도 참 아름다웠다. 아름드리 동백나무로 둘러싸인 섬, 바위에 부서지는 파도, 지중해 바다 보다 더 파란 남쪽 바다…. 이은상 시인이 그렇게 그리워하던 ‘고향 바다’가 바로 여기가 아닐까.

 

그러나 막상 내가 320여년전의 김만중이 되어 바위 사이를 거닌다고 생각하니 무척이나 쓸쓸했고 가슴이 아렸다. 아마도 김만중의 가슴속 이런 고독과 아픔으로 최초의 한글 소설 ‘구운몽’의 구상이 실타래처럼 풀려 갔는지 모른다.

 

‘구운몽’ 자체가 불교에서의 ‘공(空)’-부귀공명이 한밭 봄날의 꿈임을 표현하는 것이었고 그렇듯 인생만사를 부정하면서 다시 그 부정에서 긍정을 찾는 것이 아닐까. 이런 ‘공(空)’의 사념에 저절로 젖어들게 하는 곳이 바로 이 섬이다.

 

더욱이 김만중은 이곳에서 그의 어머니가 유배생활을 하는 자식을 근심하다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큰 충격에 빠진다. 특히 어머니는 병자호란에 이어 정축호란 때 남편이 강화도에서 순절하자 유복자가 된 아들 김만중을 키우고 교육시키는데 모든 걸 바친 터라 그 슬픔이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어머님을 그리면서’ 시를 썼는데 그 내용이 매우 감동적이다.

‘오늘 아침 어머님이 그립다는 말 쓰려고 하니/글자도 되기 전에 눈물은 이미 흥건하구나/몇 번이나 붓 끝을 적셨다가 다시 던져 버렸는지…’

 

김만중은 이 시를 쓰고서 얼마 안된 1692년, 외로운 유배지 노도의 동백나무 숲에서 눈을 감았다. 그의 나이 56세. 사계 김장생(金長生)의 증손으로서 대사헌, 대제학 등 최고위직에까지 올라 혁혁한 활동을 했으면서도 결국 유배지에서 짧은 일생을 마쳐야 했던 김만중은 ‘구운몽’의 소설 속 주인공처럼 ‘공(空)’의 철학을 남겼다.

 

이곳 남해에는 김만중 말고도 남구만, 김용, 김구 등 일곱 분의 문인들이 유배생활을 하면서 많은 글을 남겼고 고려 때까지 거스르면 정치인, 관료 등 백명 가까운 인물들이 이 곳에서 힘든 유배생활을 했다. 그래서 남해시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유배문학관’을 세우고 많은 유품들을 전시, 방문객들에게 큰 감동을 주고 있다.

 

참으로 잘한 착상이다. 이를 본받아 김만중의 후손들이 그의 선조들 묘소가 있는 대전시 유성구 전민동에 김만중의 기념관을 마련하겠다는 것. 따라서 남해시에 있는 ‘유배문학관’처럼 ‘김만중 문학관’을 유성에 세우는데 지방자치단체가 적극 나설 필요도 있을 것 같다. 결국 문화가 경쟁력이니까.

 

붉은 해가 바다를 물들이는 낙조에 취해 섬을 떠나는데 김만중이 생전에 남긴 말이 귓가에 스치는 것 같았다.

 

“우리 말을 버리고 다른 나라 글로 시문을 쓰는 것은 앵무새와 같다.”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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