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에 머리 조아린 인조의 ‘뼈아픈 현장’ 봄이 오다
치욕으로만 남지 않고 역사 속에서 살아남아 새 싹을 틔우고 있다.
■ 1636년 12월, 인조는 남한산성에 있었다
1636년 12월25일 국왕 인조는 남한산성에 있었다. 밖에서는 청군들이 남한산성 주위에다 소나무 가지와 잡목을 쌓아 올리고 있었다. 남한산성을 엿보고 함락하기 위해 무려 일주일 동안이나 목성을 축조하듯이 1백여리에 걸쳐 높게 쌓아 올린 것이었다.
병자호란 기간 동안 인조와 조선군은 무려 47일을 남한산성에서 항전했다. 청 태종은 1636년 12월1일에 12만8천명의 대군을 심양에 집결시킨 뒤 9일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침략했다. 청군은 파죽지세로 내달아 12월14일 홍제원에 도착했으며 그 일부가 강화로 가는 길을 차단하면서 서울로 진격했다.
정묘호란 때와 달리 서울을 위협당하는 상황에서 인조는 12월14일 밤 최명길의 제안으로 일단 남한산성으로 파천했다. 다음날 15일 새벽 강화로 가기 위해 남문을 나섰으나 깊게 쌓인 눈 때문에 운신조차 할 수 없었다. 인조와 신료들은 남한산성으로 되돌아왔다. 인조는 이날부터 1637년 1월30일 출성할 때까지 남한산성에서 농성했다.
당시 인조와 함께 남한산성에 들어온 관원은 400여명 정도로 확인된다. 이 밖에 아전 100여명과 관리들이 거느린 하인 300여명이 있었다. 남한산성에 들어온 군사는 1만3천명에서 1만4천명 정도로 추산된다. 이 규모는 청 군대의 10분의 1에도 미치는 못하는 규모였다. 식량 사정도 좋지 못해 한 달을 버티기조차 힘든 상태였다.
조선 군대는 남한산성을 사이에 두고 청의 침략군들과 안팎에서 크고 작은 전투를 벌였다. 12월18일에 출성해 순찰 중이던 적을 급습해 6명을 죽였다.
19일에는 포수들이 나가 적 10여명을, 21일에는 어영군이 적 10여명을, 22일에는 어영군과 훈련도감군이 40여명을 죽이는 전과를 올렸다. 이밖에도 크고 작은 전투가 벌어졌다.
그런데 1637년 1월이 넘어가면서부터 사정이 달라졌다. 조선군들의 사기가 저하되기 시작했다. 밖에서 임금을 구하기 위한 근왕병들이 와야 하는데 소식이 없었던 것이다. 남한산성에서는 각처에서 구원병이 와서 산성의 포위망을 끊어주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근왕병은 인조가 남한산성에 들어온 지 1주일이 지나도록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고립된 산성을 구원하는데 직접적인 힘이 되지 못했다. ‘병자록’에는 “적병의 수는 날마다 많아지는데 구원병은 오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의 형세는 날로 위축되며 군사들은 전혀 싸울 생각이 없다”고 기록할 정도였다.
■ 인조의 출성과 항복
1637년 1월23일 남한산성에서 장교와 군사 수 백명이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국왕이 머무는 처소까지 와서 더 이상 산성을 지킬 수 없다고 하면서 시위를 벌였다.
당시 남한산성에서는 전쟁 지속이냐 강화 협상이냐를 놓고 격렬한 논쟁이 있었다. 장교들과 군사들의 요구 사항은 강화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청 진영으로 보내라는 것이었다. 대신들이 직접 나서 회유했지만 쉽사리 해산하지 않았다. 군사들의 집단행동은 1월26일까지 계속되었다.
이 무렵 왕자들이 피신해 있던 강화도가 함락되자 결국 인조는 화의를 결정했다. 인조는 세자와 함께 남한산성 서문으로 나와 삼전도(지금의 송파)로 가서 청 태종의 발아래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치욕적인 항복의 예[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를 행하고 신하가 되겠다는 맹세를 한 후 환도했다. 이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갔고 강경하게 청과 화의를 거부한 오달제ㆍ윤집ㆍ홍봉한 등도 붙잡혀가 죽임을 당했다.
조선인들은 오랑캐로 여긴 청의 무력에 굴복하면서 큰 상처를 받았다. 임진왜란 역시 이적시하던 일본에게 침략을 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때에는 초반 열세를 제외하고 의병ㆍ수군 등의 활약으로 일본군을 조선 땅에서 내몰았다는 긍지가 있었다.
그런데 병자호란은 달랐다. 조선 국왕의 항복은 인조를 포함해 조정의 모든 신료 그리고 민들이 청 임금의 신하가 됐음을 의미했다.
병자호란은 청이 중원을 차지하는 과정에서 벌인 전쟁이어서 단기간에 총력전을 벌여 조선을 굴복시키고자 했다. 그래서 전쟁 양상은 과격하고 흉포했으며 그만큼 조선의 피해가 컸다. 국토는 무참히 유린당하고 민은 처참한 피해를 당했다.
■ 절치부심 속의 전후 재건
남한산성은 서쪽의 청량산(해발 497.9m)을 중심으로 해 북쪽으로 연주봉, 동쪽으로 망월봉과 벌봉, 남쪽으로 한봉 등을 연결해 쌓은 산성이다.
남한산성은 백제 시조 온조의 왕성이었다고도 하며, 나당전쟁이 한창이던 673년(신라 문무왕 13)에 신라가 쌓은 주장성이라는 기록도 있다. 고려시대에는 몽골군이 침입하자 이곳에서 고려민들이 항전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조선시대에 남한산성은 1626년(인조 4)에 오늘날 모습에 가깝게 개축되었다. 1624년 인조반정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 계기였다. 당시 인조는 난을 피해 도성을 떠나 공주로 피신했다.
공교롭게도 수축 이듬해인 1627년에 후금이 조선을 침략했다. 정묘호란이었다. 그러자 인조는 남한산성을 더 공고히 했다. 1628에 광주(廣州) 목사의 읍치(邑治)를 남한산성 안으로 옮기고 광주 목사가 남한산성방어사를 겸임하게 했다. 이후 남한산성을 전담하는 수어사를 따로 두고 병력도 배치했다. 이것이 병자호란 직전 남한산성의 상황이었다.
남한산성에서 인조가 출성해 항복했지만 정작 남한산성은 한 번도 함락당한 굴욕이 없는 곳이다. 현재 총 11.7㎞로 동서로 길게 모양을 이룬 남한산성은 바깥에서 보면 높고 가파르지만 안쪽은 분지처럼 경사가 완만한데다가 경작지와 물을 갖춘 천혜의 요새였다. 이 때문에 병자호란 당시 조선이 군사 규모나 무기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청군에 함락당하지 않고 47일이나 항전할 수 있었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청의 압력 때문에 군사시설을 신설하거나 보수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인조는 1638년에 남한산성을 대대적으로 수리하고 식량을 비축해두었다. 이후 숙종과 영조 대에 걸쳐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봉암성과 한봉성 등 여러 성벽과 성곽시설을 수축하고 보강했다. 1779년(정조 3)에도 개축이 이루어지면서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 새로운 여정을 향해
남한산성을 바라보노라면 우리나라가 지난 병자호란에 오랑캐 청나라에 항복한 일에 대한 분통이 치밀어 올라 살고 싶지 않은 마음이 간절해진다. 천지를 돌아보면 해와 달도 광채가 없는 듯하다.
(송규빈, 풍천유향 서문)
이 탄식은 18세기 중후반 영조 연간에 활약한 무신 송규빈(1696~?)이 본인 저술인 ‘풍천유향’의 서문에서 밝힌 소회다. 전쟁 이후 시대가 한참 지났건만 여전히 남한산성은 똑바로 쳐다볼 수 없는 만큼 뼈아픈 아픔의 역사를 간직한 곳이었다.
2014년에 남한산성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미운 오리새끼가 백조로 탈바꿈했다. 아프고 시린 역사의 현장이 문화유산이 될 수 있던 것은 오늘날 세계인들에게 침략의 야만성과 평화의 소중함을 일깨우기 때문이다. 지금 봄이 오고 있듯이 그야말로 남한산성에도 봄이 오고 있다.
정해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