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읽어주는 남자] 이주연의 ‘Friend1’

▲ FriendⅠ 20x15cm Linocut 2001

이주연 작가의 작품 속 인물은 ‘페이퍼맨’이라 불려요. ‘맨’이라고는 했으나 상황에 따라 아이도 되고 학생도 되며, 어른도 되지요. 때때로 그의 삶은 샐러리맨이었다가 산책자였다가 철학자예요. 시인의 기질도 농후하고요. 아주 단순해 보이는 형상의 꼴로 페이퍼맨을 얕잡아 보았다가는 큰 코 다칠 게 뻔해요.

 

작가는 개인전을 앞두고 작품을 보내 왔더군요. 저는 그 작품들을 보다가 문득 ‘관계’라는 말이 떠올랐어요. 작품집의 첫 작품들은 서로 마주보고 있는 작품인데 오른손과 왼손을 내밀어 손을 맞잡으려는 의지로 충만하죠. 그런데 그들의 표정을 보고 있으면 그 만남의 관계성이 어딘지 우울하고 고독해요. 왜일까요?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사랑의 정신분석>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더군요. “자기 속에서 타자를 발견함으로써 우선 나를 나 자신 속에 확립시킬 수 있”다고 말예요.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여요. “그리하여 나는, 나와 다른 사람들, 나와 비슷한 사람들과의 사이에 가능하게 된 만남의 무수한 경험을 향하여 나를 열게” 된다고.

 

작품 속 페이퍼맨의 우울과 고독은 바로 자기 자신에게서 비롯된 게 아닐까 생각돼요. 그가 맞잡으려는 손도 바로 그 자신에게 내미는 손이라는 생각이고요. 자기와의 솔직하고 진솔한 만남이 없이는 결코 타자와의 관계도 좋지 못할 거예요. 다석 류영모 선생은 이기적인 ‘제나’와 욕망으로 가득찬 ‘몸나’를 벗어야만 참나인 ‘얼나’에 이른다고 했지요.

 

저는 페이퍼맨의 정체성이 그런 ‘얼나’를 향한 참나의 화두가 아닐까 싶어요. 저 작품 속 페이퍼맨은 아직 손을 내밀었을 뿐 걷기를 시작하지는 않아요. 사실 진정한 만남과 관계는 손에서 발로 이뤄져야 하지요. ‘걷기’라는 행동을 통해서 말예요. ‘걷는 발’은 아주 중요해요. 브르통은 걷는다는 것이야말로 자신을 세계로 열어놓는 것이라고 했거든요. 발로, 다리로, 몸으로 걸으면서 인간은 자신의 실존에 대한 행복한 감정을 되찾는다는 거죠.

 

자, 그렇다면 저 페이퍼맨은 누구일까요? ‘걷기’가 하나의 언어라고 했을 때 자신의 걷기를 선택한 저들은 무엇을 향해 걸어야만 할까요? 그들도 그들의 실존을 고민하면서 행복한 감정을 되찾고 있는 것일까요? 저는 생각해요. 우리 모두의 표상주체인 저 페이퍼맨이야말로 모두의 진정한 초상이라고. 그러니 오늘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 손을 내밀어 ‘나’를 만나는 사건을 가져야 할 거예요.

 

김종길 경기문화재단 문화재생팀장

© 경기일보(www.kyeonggi.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