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품은 驪江에 人和 결합된… 난공불락의 철옹성
어느 해 무슨 계절에 찾았는지 조차 기억이 흐릿하지만 성위에서 넋을 놓고 바라보았던 여강의 아름다운 풍경은 흑백사진처럼 또렷하다. 파사산은 해발 230m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산성 남문으로 향하는 산길은 제법 가파르다. 이렇게 가파른 언덕에서 위를 보며 성안을 공격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잠시 병법에서 강조하는 지리(地利)와 인화(人和)의 관계를 생각했다. 산중턱 곳곳에 산동백으로도 불리는 생강나무 노란 꽃이 피어 봄이 왔음을 알려주었다.
쉬엄쉬엄 걸어 다다른 남문은 문화재청에서 복원공사가 한창이다. 접근금지를 알리는 팻말을 보는 순간 낭패감이 일었다. 그러나 여기서 그냥 발길을 되돌릴 수 없는 일, 사정을 밝히고 성안에 들어섰다. 성문 양쪽에 서 있는 육각형의 주춧돌은 파사산성의 당당한 위상을 웅변하는 듯하다.
안내판을 통해 확인한 성벽의 규모는 둘레가 943m에 높이는 4.3~4.8m이다. 남한강의 시원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땀을 식히며 유유히 흐르는 강물과 여주의 너른 들판을 한참동안 굽어보았다. 가슴이 상쾌하다.
정상을 향해 시계 방향으로 천천히 걸었다. 성벽의 폭이 생각보다 매우 넓다. 두 그루 소나무가 성벽에 나란히 서 있다. “이 사이로 지나가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글을 읽으며 소나무 사이를 지났다. 장대(將臺)가 서 있었을 정상에 올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겹겹이 늘어선 산들과 그 사이를 흐르는 남한강이 아름답다. 100년 전만해도 저 강물위에는 서울을 오가는 배들이 끊이지 않았을 것이다. 산성 가까이에는 그 유명한 이포나루가 있다.
여주 사람들은 신륵사 앞을 지나는 남한강을 ‘여강(驪江)’이라 부른다. ‘여(驪)’란 곧 가라마, 검은말을 나타내는 글자이다. 강물에서 말이 나왔다는 전설이 있지만 시퍼런 물빛 때문에 붙여진 말일 것이다.
■ 원호, 여강에서 백정왜를 쓸어버리다
1592년 5월 강원도 조방장 원호(元豪, ?~1592)가 왜적이 나루를 건너지 못하도록 여강 신륵사에 진을 쳤다. 강원 감사가 그를 불러 자리를 비웠을 때 왜적이 강을 건너 북상했다. 여주 사람들은 신륵사 인근 구미포에 주둔한 왜적들을 ‘백정왜[屠子倭]’라고 불렀다.
성질이 잔인하고 포악하여 만나는 사람을 모두 칼로 난도질해 죽이는 왜군들의 만행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원호는 새벽에 고을 군사를 이끌고 강을 건너 왜군 진영을 급습해 적을 50여명 죽였다. 겨우 목숨을 건진 적들은 멀리 도망가 버렸다.
원호가 지키는 동안 왜군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이 전공으로 여주 목사에 임명된 원호는 조방장을 겸임하며 경기와 강원 양도를 오가며 적을 막았다. 그러나 한 달 지난 6월 원호는 강원감사의 명에 따라 금화(金化)에 주둔한 적을 공격하기 위해 출동했다가 정보를 미리 파악한 적에게 포위되어 전사하고 말았다. 임란 초기에 적을 토벌하다가 전사한 장수로 원호만한 사람이 없다는 평가를 받았다.
■ 승병장 의엄, 승병을 이끌고 파사산성을 쌓다
여주 파사산성은 임진왜란(1592년)이 일어나면서 주목을 받았다. 한강 길목을 지키기에 이보다 좋은 곳이 없기 때문이다. 도체찰사로 전장을 누비던 서애 유성룡이 파사산성의 수축을 결정하면서 서산대사 휴정(休靜, 1520~1604)의 제자로 황해도 승군 총섭을 맡고 있던 의엄(義嚴)에게 책임을 맡겼다. ‘조선왕조실록’ 1593년 5월 15일자에 “휴정의 제자 중에 특출하여 칭송할 만한 자로 속명이 곽언수(郭彦秀)인 의엄(義嚴)이 뽑혔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의엄은 전투와 군량을 모집하면서 모두 공을 세웠는데 둔전을 개간하기 위해 소[牛]를 모을 때도 역량을 발휘했다. 의엄은 휘하의 승려들을 이끌고 여주로 달려왔다. 유성룡은 지도력과 성실함을 두루 갖춘 의엄을 깊이 신뢰했다. 1596년 봄, 유성룡이 파사산성을 방문해 팔도 선교종 도총섭 의엄에게 ‘파사성’이란 시를 지어주었다.
파사성상초천천(婆娑城上草) 파사성 위로 풀이 무성하고
파사성하수영회(婆娑城下水廻) 파사성 아래로 물은 굽이쳐 돈다
춘풍일일취불단(春風日日吹不斷) 봄바람은 날마다 끝없이 불어오고
낙홍무수비성외(落紅無數飛城) 떨어지는 꽃잎들이 성 모퉁이에 날린다.
1595년 여름, 도총섭 의엄은 파사산성 안에 집을 짓고 성 아래에 들판에 국영농장인 둔전을 개척했다. 승군의 무예를 지도하고 시험하여 뛰어난 자에게 상을 주고 급료를 지급해 주었다. 한겨울, 파사성 건설을 시작했다. 행주와 오산 독성산성처럼 성안으로 들어가 살려는 사람에게는 다른 부역을 모두 면제하는 혜택을 주었다.
“소승은 파사에 성을 축조하는 일을 사양하지 않고 맡아 힘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일의 이루고 이루지 못함은 조정의 조처 여하에 달려 있습니다. 파사성의 역사를 지난해에 일으켰으나 역군이 모이지 않음으로써 공정은 절반도 성취하지 못했는데, ……방비의 조처를 잃는 것은 실로 국가의 잘못입니다”
이 상소로 의엄은 대신을 비롯한 관료와 유생들의 표적이 되었다. 심지어 “조정을 가벼이 여긴다”며 강하게 성토했다. 그러나 선조와 유성룡이 의엄을 감싸주고 그의 요청대로 지원을 시작했다.
경기 수영에 소속된 여주·지평의 수군(水軍)은 번을 제외시켜 파사성에 소속되게 하여 상류 쪽을 방비하도록 하였다. 의엄은 산성 안에 민간인들이 살 집도 여러 채 지었다. 그러나 물이 부족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생활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1597년 겨울, 의엄은 도체찰사 유성룡의 명을 받아 강가에 작은 둔덕을 만들고 그 위에 장대를 세워, 밤에는 등을 달아 서로 신호하게 하고 낮에는 깃발을 올려 서로 보이게 하였다. 여울의 모래톱이나 산모퉁이 수풀이 우거진 곳에도 설치하여 급보를 신속히 전달할 수 있었다. 파사성과 용진(龍津) 사이에 있는 부용성(芙蓉城)에도 흙으로 높이 쌓아서 망대를 설치했다.
의엄은 남한강에 대한 방비를 철저하게 수립했다. 의엄은 유성룡의 명을 받아 성곽 방어와 공격하는 절차를 연습시키고 무예를 연마하도록 했다. 조정의 명을 받은 관리의 평가를 받았는데, 서울의 훈련도감 군사 훈련만은 못해도 자못 법도를 갖추었다고 높이 평가됐다.
이렇게 파사산성과 도총섭 의엄의 역할이 커지자 이를 비방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대신들은 물론 성균관 생원들까지 나서서 의엄의 삭직을 요청했다. 무슨 까닭인지 도총섭을 지낸 의엄이 환속하고 이름도 곽진경(郭震卿)으로 바꾸었다. 의엄은 환속한 후에 군공에 따라 종2품의 동지(同知)에 올랐다. 1622년 후금이 조선을 침략할 조짐을 보이자 조정에서 의엄에게 승병을 모집해줄 것을 요청했다.
전망이 아름다운 산성으로 손꼽히는 파산산성에는 흥미로운 이야기도 풍부하다. 축성과 관련된 남장군과 여장군의 전설은 물론 원호, 유성룡 같은 인물들의 숨결이 배어 있는 곳이다.
관계자의 말을 들어보니 파사산성이 복원되기 까지는 앞으로도 적잖은 시간이 걸릴 것 같다. 이쯤에서 다시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다. 성을 답사하면서 늘 아쉬움을 느끼는 것인데, 그것은 산성에 반드시 있는 샘물을 먼저 복원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 찾아왔다. 지금쯤 파사산성에도 꽃이 한창일 것이다.
김영호 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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