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마라톤과 같다’고 한다. 인생의 어떤 면을 보고 그렇게 말했을까.
마라톤 하면 머리에 스치는 사람이 있다.
이봉주. 충남 천안이 고향인 이봉주의 나이는 올해 만 46세로 불혹을 훌쩍 넘었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마흔 한번이나 마라톤을 완주했으니 그가 달린 거리는 지구의 다섯 바퀴에 해당할 만큼 길다.
그러나 그의 신체적 조건은 마라톤과는 거리가 멀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짝발에 평발이라는 것. 뛰는 것 자체가 지옥 같은 슬럼프에 빠져들 때도 그것을 불굴의 의지로 극복하면서 마라톤을 해왔다. 어떤 경우에도 포기하지 않고 우직하게 밀고 가는 것, 이것이 그의 강점이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이봉주는 국민들에게 금메달의 꿈을 안겨주리라 기대했었다. 그러나 15km 지점에서 아프리카 선수에 부딪히는 의외의 불상사로 그 꿈은 깨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완주를 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2001년 보스톤 마라톤 출전을 앞두고는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 충격에 빠지기도 했다. 시드니 올림픽의 패배, 아버지의 사망, 그야말로 슬럼프의 연속이었다.
‘시련의 아픔’은 너무나 컸다. 그러나 이봉주는 다시 일어나 달리기 시작했고 그해 말 후쿠오카 마라톤에 출전하여 2위를 함으로써 스스로 자신의 에너지를 충전할 수 있었다.
그리고 2001년 마침내 마라톤대회의 세계적 명문, 보스톤대회에 출전한다. 레이스 중반까지 10여명이 선두를 유지했는데 이봉주는 선두 그룹을 계속 유지해나갔다. 30km 지점부터는 서서히 속도를 높여갔다.
‘심장 파열의 언덕’이라는 최고의 난코스에서는 불과 4명만이 선두를 유지했다. 이봉주는 그들 숨소리가 무척 거칠어지고 있음을 느꼈다. ‘저들 모두 지쳐있구나.’ ‘이 때다’하는 판단과 함께 발바닥에 스피드를 가하며 치고 나갔다.
그리고 얼마전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리며 ‘아버지!’하고 외쳤다. 아버지가 눈앞에서 웃는 모습으로 나타나며 “포기말라!”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얼마쯤 달렸을까. 옆을 보니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이봉주 자신만이 1위로 달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하여 1950년 6ㆍ25 전란 속에서 보스톤 마라톤대회에 출전하여 우승을 한 함기용 선수에 이어 50년만에 이봉주 선수가 월계관을 차지해 세계에 그 이름을 날렸다.
손기정과 황영조처럼 올림픽에서 우승을 하지는 못했지만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28위, 2009년 서울 국제 마라톤에서 14위를 마지막으로 선수생활의 막을 내렸다. 서울시청 팀 소속으로 마라톤을 시작한지 20년, 그는 이제 후진 양성에 심혈을 쏟고 있다.
움푹 패인 쌍꺼풀에 전형적인 충청도 사투리의 이봉주가 보여준 것은 어떤 악조건과 역경도 포기하지 않고 극복하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올림픽 월계관은 써보지 못했지만 그의 인생을 보람있게 꾸미며 한국 마라톤을 위해 헌신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요즘 봄이 되면서 전국 여기저기서 마라톤대회가 열리고 있다. 어떤 대회는 최고 2만명의 아마추어 마라토너들이 참가하는 등, 우리나라의 마라톤 인구는 10km와 하프까지 포함하면 약 4백만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그야말로 마라톤 전성기를 맞고 있다.
마라톤 인구가 늘어나는 만큼 경제가 어려운 지금 그 포기하지 않는 정신, 어떤 시련도 극복할 수 있는 정신도 우리 국민들에게 깊게 퍼졌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역시 인생은 마라톤이다. 정치도 그렇다.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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