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5년 4월 15일, 링컨이 극장에서 공연을 관람하던 중 갑자기 나타난 암살범의 총탄을 맞고 56세로 숨을 거둔지 151년.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존경받는 링컨, 특히 노예 해방의 대명사로 세계 역사에 알려졌지만 그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애매모호한 면이 많았다.
1861년 남북전쟁은 노예 해방을 위한 전쟁이었는데도 남부를 점령한 북군 사령관들이 노예 해방을 선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군부의 불만을 자아내기도 했다.
이런 현상에 워싱턴의 한 신문이 왜 링컨은 노예 해방을 위한 전쟁을 하면서도 노예 해방을 머뭇거리고 있는가에 대해 의구심을 보이며 비판의 기사를 게재했다. 링컨은 즉시 그 신문사의 편집국장에게 속내를 드러내는 편지를 썼다. 첫째, 자기가 노예해방을 선언하지 않는 것은 연방제도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고 둘째, 노예를 해방하지 않고도 연방이 유지된다면 이대로 갈 것이다…….
그러니까 링컨은 노예 해방 보다 미국이라는 그의 분열된 조국을 통합하고 유지하는데 대통령으로서 더 무게를 두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노예 해방이 중요하다 해도 그것은 미국 연방의 틀 안에 존재하는 정책의 하나일 뿐이라는 뜻이다.
사실 링컨의 남북전쟁은 ‘노예 해방’을 명분으로 내세웠을 뿐 더 큰 목적은 연방을 이탈하려는 남부를 하나로 묶어놓는 데 있었다는 주장이다. 면화의 수출 등 유럽과의 무역에서 남부는 자유무역을, 산업지대의 북부는 보호무역을 주장하여 충돌을 빚고 있었다.
실제로 당시 남부 900만 인구 중 노예는 0.1%에 불과한 8천명. 이런 가운데 노예 해방을 명분으로 전쟁을 하면서 남부의 노예들이 도망쳐 북군에 입대하는 숫자가 자꾸만 불어났다.
이 때문에 북군의 병력에 큰 보탬이 되었다. 그렇게 시간을 끌면 끌수록 노예의 탈출은 증가했고 연방제를 무너뜨리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노예제도는 폐지될 수밖에 없는 상황까지 온 것.
그리하여 마침내 타이밍을 기다린 링컨은 1863년 1월 1일, 의회에서 역사적인 노예 해방을 선언하기에 이르렀고 그해 11월 19일 민주주의의 교과서처럼 되어 있는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는 지상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게티스버그 연설을 탄생시킨다.
266개의 단어로 된 링컨의 이 역사적 연설문 원문에 ‘노예 해방’이라는 말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오직 간결하고 분명한 단어로 ‘살아있는 우리’ 모두가 조국에 바쳐야할 의무만 강조한다. 그리고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이 세 마디로 결론을 내린다.
역시 미국의 단합, 그것이 링컨에게는 노예 해방보다 더 중요한 목표였던 것이다. 이를 위해 그는 자기를 비난하는 신문사 편집국장에게 편지를 쓰고, 심지어 탄핵운동까지 벌어진 상황에서도 인내심을 갖고 정적들을 설득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엄청난 전사자가 속출해도 그 소명에서 주저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목숨까지도 바쳤다.
지금 우리나라는 4ㆍ13 총선 후 일찍이 없던 정치적 분열과 혼란에 빠져있다. 이럴 때 링컨 같은 통합의 지도자가 절실하다는 뜻에서 링컨 이야기를 길게 소개했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그 정신이면 우리는 오늘 같은 파행적 분열을 겪지는 않을 것이다. 마침 링컨 서거 151주년을 보내며 떠오르는 생각이다.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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