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읽어주는 남자] 이상호의 ‘얼굴을 감싸 쥔 남자’

▲ 이상호_얼굴을 감싸쥔 남자_180x122cm 1986

이 그림은 2013년 2월 5일에 소개했어요. 그런데 참으로 안타깝게도 제가 작가를 잘 못 알리는 실수를 범했지 뭐예요. 저는 이 작품이 시각매체연구회에서 활동했던 광주의 이상호(1960~ ) 작가의 것이라 생각했어요.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이상호’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던 1980년대의 작가는 일명 ‘백두의 산자락 아래 밝아오는 통일의 새날이여’(1987)라는 걸개그림을 그렸던 ‘전정호와 이상호’의 그 이상호 밖에는 떠오르지 않거든요.

 

그런데 1989년에 미국으로 건너간 뒤로 완전히 잊힌 또 한명의 이상호(1956~ ) 작가가 있었더군요. 앞의 이상호 작가가 독재정권에 맞섰던 민족·민중미술 계열이라면, 뒤의 이상호 작가는 인간의 형상성을 통해 동시대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반영했던 ‘형상미술’ 계열이었죠. ‘목판모임 나무’ 동인이었고요.

 

제게 이 사실을 알린 이는 기획자이자 미술사가인 김진하 선생이에요. 선생은 “형상미술의 작가들은 독자적으로 자신들의 형식과 주제를 가다듬어온 서상환, 안정민과 ‘목판모임 나무’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윤여걸, 이상호, 손기환, 김억, 정원철, 김진하, 이섭 등”이었다며, “작품 내에서 당대의 부조리한 현실, 폭력, 억압 등을 상징적으로 반영·고발하거나 저항하며 작품의 밀도와 형식, 어법과 표현성, 새로운 판각법 등을 중요시하며 사회 현장보다는 전시장미술을 지향한 경향이 비교적 짙었다”고 얘기 하더군요.

 

1987년 8월 7일자 매일경제 기사 중 일부예요. 제목은 “삶의 현실·사물 세계 그린 형상미술제 열려-8일부터 한강미술관”인데요, 내용 중에 이런 문구가 있어요.

 

“형상미술이란 삶의 현실이나 사물의 세계를 형상(im-age)을 통해 해석하는 입장으로 구상과 추상의 중간적 위치에 있다. 즉 형상미술은 형태가 있다는데서 추상회화와 분리되며 대상을 재현하고 묘사하는 사실성에 치중된 구상회화와의 차이점은 현실의식을 바탕으로 보다 사회적 리얼리즘에 충실하다는데” 있다고.

 

자기 존재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은 흐르는 시간에 갇혀서 흘러가버리기도 해요. 분명히 오늘의 시간을 살았으나, 영혼은 어제에 속해 있어서 과거의 추억들만 꺼내 놓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죠. 지금 여기에 존재하나, 그의 현재는 과거의 풍경 속에 갇혀서 홀로 외로울 거예요.

 

이상호의 ‘얼굴을 감싸 쥔 남자’도 홀로 외롭죠. 남자는 드넓은 광야에서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어요. 푸른 하늘은 먹구름과 흰 구름이 바람에 휩쓸려서 온통 불안이죠. 화면을 가득히 채운 남자의 육체는 어두운 대지와 불안의 하늘을 검은 바지와 흰 셔츠로 고스란히 전치시켰어요. 세찬바람이 그의 등을 떠밀지만 그는 얼굴을 감싼 채 나아가지 않는 거죠.

 

저는 1986년에 새긴 이 작품이 30년이 지난 오늘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상징을 갖는다고 봐요. 19세 비정규직 청년의 죽을 비롯한 일련의 ‘죽음들’ 때문이죠.

 

김종길 경기문화재단 문화재생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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