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어줘 고맙다”… 老兵으로 다시 만난 전우

본보 참전유공자 인터뷰 기사 보고 김원영 옹, 포로수용소 시절 동료 직감
생사고락 이야기 나누며 ‘감격 해후’

1.JPG
▲ 6ㆍ25 전쟁에 참전했다 북한군에게 포로로 끌려가 혹독한 포로수용소 생활을 함께 견뎠던 옛 전우들이 본보 보도(24일자 3면)를 통해 생사를 확인, 63년여 만에 감격적인 만남을 가졌다. 27일 6ㆍ25 참전유공자회 성남시지회 사무실에서 (왼쪽부터) 문영준(86), 한신석(85), 김원영(85ㆍ경기사회봉사회장)이 해후를 하며 미소와 함께 눈시울을 붉히고 있다. 김시범기자
“지금까지 살아 있어줘서 고마워, 너무 고마워”

 

63년 만에 다시 만났다. 마지막으로 헤어졌을 때가 6·25 한국전쟁이 막 끝났던 1953년 8월로 당시만 해도 앳된 얼굴의 22살 소년이었는데, 다시 만난 2016년 6월에는 어느새 백발에 주름이 깊게 잡힌 노인들이 돼버렸다. 

그래도 아직까지 살아서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전우를 다시 만났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두 노인은 가슴이 벅차 눈시울을 붉혔다.

 

1953년 북한 평안북도(현 자강도) 시중군에 있던 포로수용소에서 함께 생활한 국가유공자 한신석씨(86)와 김원영씨(86)의 사연이다. 한씨와 김씨는 6·25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과 1953년에 중공군에게 각각 붙잡혀 시중 포로수용소에서 생활했다.

 

김씨는 “당시 시중 수용소에 포로로 생활한 국군은 총 300여 명 정도”라며 “당시 함께 지낸 이들은 나이가 들어 죽지 않았을까 싶었는데 한씨가 이렇게 살아있어 주니 고마울 따름이다”고 말했다. 김씨는 지난 24일 오전에 6·25 참전유공자로서 본보와 인터뷰한 한씨 사진과 기사를 보며 ‘나와 같은 포로수용소에 있던 동료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불현듯 스쳐 지나갔다고 했다.

이에 여기저기 수소문한 끝에 27일 오전 10시께 포로수용소에 함께 있었던 동료임을 확인했다. 김씨는 동료를 보고픈 마음에 곧바로 6·25 참전 국가유공자회 경기도지부 성남지회 사무실로 향했다.

 

첫 만남에서 김씨와 한씨는 한눈에 동료임을 직감했다. 서로 손을 붙잡고 “반갑다”란 말만 연신 내뱉었다. 김씨는 먹먹했는지 얼굴을 붉힌 채 감격에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이 자리에서 한씨와 김씨는 당시를 회상했다. 한씨는 “사실 수용 당시에는 우리를 감시하는 북한군이 무서워 이야기를 제대로 나누지 못 했다”며 “그러나 우리는 모두 같이 살아 돌아가자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함께 희망을 나누며 하루하루를 버텼다”고 말했다.

 

당시 이들은 포로수용소에서 매일같이 세뇌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이들은 “포로수용소에서 매일같이 북한으로부터 ‘남한과 미국의 자본주의는 무조건 나쁘다’는 식의 교육과 이에 대한 일방적인 토론을 진행했었다”며 “특히 백모녀라는 영화 등을 통해 북측의 사상교육을 받았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이들은 7월27일 한국전쟁이 휴전됐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윽고 남측과 북측의 정전협정에서 포로교환을 통해 한씨는 8월24일, 김씨는 8월28일에 휴전선을 넘어왔다.

 

김씨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기쁨에 벅찼으나, 마지막까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함께했다”라며 “휴전선을 넘는 그 순간까지 꿈인지 생시인지 몰랐다”고 말했다. 이에 옆에 있던 한씨도 집에 돌아가던 그때를 떠올리며 “나 역시 죽는 줄만 알았다”며 맞장구를 쳤다.

 

두시간 가량의 대화에서 이들은 당시 수용소 생활을 공유하며 옛 생각에 젖어들었다. 대화와 만남이 헤어지는 그 순간까지 서로 손을 놓지 않았던 한씨와 김씨. 이들은 “오늘의 아쉬움은 조만간 대포 한잔으로 풀며 길게 이야기하자”고 마무리 지었다.

 

이들은 “그래도 건강히 살아 있어줘서 고맙다”는 말을 연신 이어가며 “오래오래 건강히 살자”고 아쉬움을 뒤로한 채 또다른 만남을 약속했다. 

조철오기자

© 경기일보(www.kyeonggi.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