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화랑들의 삼국통일 기상 깃든 철옹성
신라가 550년대 후반 축성… 한강유역 진출 거점
그러나 1999년 용인시의 의뢰로 충북대학교 중원문화연구소가 지표 조사를 통해 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는 유물을 대량 발굴하면서 시대의 수정이 불가피하게 됐다. 이후 지난 2011년부터 올해 봄까지 경기도박물관의 5차에 걸친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철제 화살촉, 갑옷 부속구 같은 군사 유물과 철제 가위, 대부장경호, 고배 같은 신라계 토기가 출토됐다. 주목되는 것은 팔각형 등 다각을 이루는 2동의 건물지와 대형의 장방형 초석 건물지 2동, 점토와 석재로 구축된 집수시설이 발견되었던 점이다. 팔각형 건물지에서 고배(高杯, 굽 높은 잔)와 토기완(흙으로 만든 사발모양의 접시) 같은 유물이 출토됐다. 아울러 삼국시대 수혈 주거지 25기와 원형 수혈 13기 등 다양한 종류의 유구도 확인됐다.
문화재청은 할미산성을 신라가 한강 유역으로 진출하던 시기에 쌓은 것이며 전투가 없는 평상시에는 시조신과 천신에게 제사를 모시는 의례 공간으로 활용되었을 것으로 보았다. 대형의 초석 건물지는 의례를 치르기 위해 준비하는 공간으로 집수시설은 의례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물을 제공하는 시설이라는 것이다. 27㎞ 떨어진 하남시의 이성산성에도 8각, 9각, 12각 건물지와 두 개의 집수지가 있다. 이성산성 역시 비슷한 시기에 신라가 축성한 성곽으로 알려져 있으니 비교연구를 하면 좋을 것이다.
■ 할미산성에서 굽어보는 한강
550년 고구려와 백제는 한강유역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고구려에 밀린 백제는 신라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신라 진흥왕은 백제 성왕의 요청을 받아들여 동맹을 맺고 신라는 한강 상류를, 백제는 한강 하류를 공략한다는 작전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진흥왕은 이사부에게 고구려와 백제가 서로 차지하려는 도살성과 금현성을 기습하여 점령하도록 명했다. 같은 시기 신라는 가야지역에 이주해 살던 백제 사람들에게도 압력을 가해 본국으로 철수시켰다. 551년 백제와 신라의 동맹군이 고구려를 공격했다. 가야의 군사들이 포함된 연합군은 고구려 군대를 밀어붙였다. 이때 선봉은 백제군이 맡았다. 연합군은 동쪽의 고구려 영토를 빼앗고 서쪽으로 한강유역을 공격해 고구려 방어군을 몰아냈다. 당시 고구려는 돌궐의 침략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이 전투에 집중할 수 없었다.
고토회복에 성공한 백제는 이번에는 왜국에 사신을 보내 구원병을 요청했다. 한강유역을 독차지하기 위한 속셈이었다. 그러나 속셈을 알아챈 신라가 먼저 선수를 쳐서 한강유역을 차지해버렸다. 신라가 한강유역을 차지하자 당황한 것은 백제만이 아니었다. 고구려는 남진 거점을 봉쇄당했을 뿐 아니라 내륙을 관통하는 수운과 중국으로 통하는 서해의 뱃길까지 잃게 되었다. 백제는 신라와 고구려가 밀약을 맺자 이에 대항할 수 없음을 알고 한강에서 군사를 철군했다. 553년 7월 신라는 백제의 진출을 차단하기 위해 한강 유역에 ‘신주(新州)’라는 지방행정조직을 설치하고 군대를 배치했다. 진흥왕은 신주의 초대 군주로 금관가야 왕족출신의 김무력(金武力)을 임명했다. 신라는 백제가 점령하고 있던 한강 하류지역까지 차지하고, 당나라로 연결하는 행상 교통요지 당항성마저 확보했다. 한강 하류지역에 ‘신주’를 설치하면서 용인지역은 신라의 영역으로 들어갔다. 이때 할미산성도 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럼에도 백제는 신라와의 동맹을 포기할 수 없었다. 바로 고구려 때문이다. 고구려 역시 호전적인 백제를 견제하기 위해 신라가 필요했다. 신라는 고구려와 밀약을 맺고 백제의 영토를 조금씩 갉아먹었다. 554년 7월 백제왕 성왕이 충청도 옥천의 관산성을 공격하다가 신주의 군주 김무력의 복병에 걸려 죽었다. 이 전투에서 성왕을 따르던 좌평 네 사람과 사졸 2만 9천6백 명도 모조리 죽음을 당하고, 단 한 사람도 살아 돌아가지 못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실려 있는 내용이다. 555년(진흥왕 16년) 10월에 진
왕이 북한산에 순행해 영토를 넓혀 정했다. 이때 북한산 비봉에 순수비가 세워졌다. 바야흐로 신라가 백제를 압도하고 고구려를 위협하기 시작한 것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할미산성은 신라가 백제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밀어내고 한강유역을 차지한 후 신주를 건설한 것과 관련이 깊다. 신주의 군주 김무력이 할미산성을 축성했을 가능성도 매우 높다. 금관가야 왕족출신의 김무력은 신라에서 벼슬을 살고 있었지만 경주 출신의 신라귀족들에게 따돌림을 당했다. 김무력은 출세를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던 인물로 이때 세운 전공으로 지위를 단단히 굳혔다. 김무력은 삼국통일의 주역 김유신의 할아버지이다.
■ 신라, 화랑을 길러 삼국통일의 주역이 되다
6세기 후반은 삼국의 운명이 뒤바뀌던 격동의 시대였다. 이때 고구려의 온달, 신라의 이사부와 사다함, 12현 가야금을 만든 우륵 같은 전쟁 영웅과 예인들이 눈부시게 활약했다. 사다함은 가야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이사부의 부장으로 출전하여 반란군을 평정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진흥왕이 사다함에게 포상으로 좋은 논밭과 포로 200명을 내리자 사다함은 포로는 풀어주어 양민이 되게 하고 논밭은 함께 싸운 부하들에게 모두 나누어주었다. 신라는 새로운 풍속과 제도를 통해 사다함처럼 민중들의 존경을 받는 청년 지도자를 길러냈다. 바로 진흥왕 37년(576)에 만들어진 화랑제도이다. 김대문은 ‘화랑세기’에서 “어진 보필과 충성스러운 신하는 여기서 선발됐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졸도 이에서 나오게 된다”고 했다. 또한 최치원은 난랑비 서문에서 “나라에 심오하고 미묘한 도(道)가 있는데 풍류라고 한다. …실로 삼교(三敎, 유 불 도)를 포함한 것으로써 여러 백성을 접촉하여 교화를 시켰다. 또한 들어가면 집안에서 효도하고 나가면 나라에 충성함은 노나라 사구[공자]의 뜻이요, 자연 그대로 행하고, 말 없는 가르침을 행함은 주나라 주사[노자]가 주장한 요지며, 모든 악한 짓을 하지 말고 착한 일만 받들어 행함은 인도 태자[석가]의 교화다”라고 정리했다. 할미산성은 신라의 풍류나 화랑제도와도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할미산성은 북쪽은 높고 남쪽은 경사가 완만하며 남북이 동서보다 길다. 지표조사 결과 산성 둘레는 651m, 성안 북쪽 정상 아래는 180m의 공유벽이 있다. 성벽 높이는 약 4m로 자연석을 다듬어 쌓았다. 내벽에 폭 3m 가량의 내환도가 있으며 외벽 밖으로도 외환도로 추정되는 약 2m 가량의 평탄면이 있다. 성벽 하단부는 원형으로 남아 있으며 상부는 거의 붕괴돼 바깥쪽으로 흘려 내렸다. 남서쪽에는 치성형태의 성벽이 무너져 있으며 동쪽의 지대가 낮은 곳에는 문지로 추정돼는 곳이 있다.
산성 내부에서 확인된 백제시대의 원형 수혈유구는 신라가 석축성곽을 축성하기 전 백제가 이곳을 먼저 점유했던 사실을 알려준다. 이처럼 할미산성은 역사의 주도권이 백제에서 신라로 옮아가는 중요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과정에서 할미산성은 매우 중요한 거점이었다. 학계에서 정리한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추정해보면 할미산성은 550년대 후반에 신라가 축성하여 675년 신라가 당나라 군대를 몰아내고 삼국을 통일할 때까지 활용됐던 것으로 보인다.
■ 화합과 상생의 축제로 거듭나는 ‘할미성 대동굿’
오래전부터 할미산성의 주위에 있는 다섯 개 마을 주민들이 한 자리에 모여 화합과 상생의 굿판을 벌여왔다. ‘할미성 대동굿’은 온 마을주민들이 모여서 마을의 평안과 안녕을 위해서 펼치는 화합과 상생의 대동굿이다. 할미산성의 유래를 토대로 형성된 ‘할미성 대동굿’을 용인시 향토민속 무형유산으로 지정한 사실은 고무적이다. 할미성 대동굿을 통해 용인시가 할미산성의 가치를 널리 알리기를 희망한다. 할미산성은 신라부터 시작한 한민족 고유의 제례와 화랑도의 풍류정신이 깃든 터전이기에 더욱 그 뜻이 깊다.
김영호 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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