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지켜낸 경기도 산성을 가다] 21. 이천 ‘설봉산성’

“한강유역 차지하라” 삼국시대 國運 건 격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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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봉산성 성벽 모습
다산 정약용은 산성을 쌓기에 좋은 지형 네 가지를 이렇게 꼽았다. 

첫째는 사방이 높고 중앙부가 낮아 남한산성과 같은 지형인 ‘고로봉’이다. 둘째는 정상부가 평평하고 넓으며 사방을 잘라낸 것 같이 급경사를 이루고 있는 ‘산봉’이다. 

셋째는 배후에 봉우리가 있어 그 가운데에 장대를 설치할 수가 있고 허리 부분에 성을 쌓아 많은 무리를 수용할 수 있는 ‘사모봉’이다. 넷째는 양쪽 끝단이 높고 가운데 허리 부분이 약간 낮은 지형으로 무릇 산길을 막아 쌓은 성과 같은 ‘마안봉’이다. 현재 경기도에 남아 있는 산성도 다산이 소개한 네 가지 범주에 드는 것들이다. 

다산 기준에 따른다면 이천 설봉산(雪峰山, 394m)에 자리 잡은 설봉산성은 산봉과 사모봉에 가깝다. 설봉산은 불경에 나오는 설산과 같다하여 ‘설봉’이라 불렸으며, 산세가 학이 날개를 편 모양과 비슷하다해 ‘무학’이라고도 불렸다.《신증동국여지승람》과《여지도서(輿地圖書)》에 설봉산성의 둘레를 5,112척(1,500보)으로 기록하고 있다.

 

설봉산성으로 오르는 길은 설봉호수 오른편에 있다. 칠월의 한낮이라 조금 걸었지만 벌써 온 몸이 땀범벅이다. 15분쯤 걸었을까 시야를 가로막는 성벽이 나타났다. 원형을 복원한 동문이다. 부드러운 곡선의 성벽이 햇살을 받아 환하게 빛났다.

등산객들의 출입구가 된 설봉산성 동문은 여느 산성의 출입구와 다르다. 밖에서 볼 때 왼쪽성벽은 성안으로 굽어들게 했고, 오른쪽 성벽은 밖으로 곡선을 그려 어긋나게 옹성으로 쌓았다. 산성에 올라서자 운치 있는 소나무 사이로 이천 들판이 펼쳐졌다. 비 온 뒤에 맞은 화창한 날씨라 멀리 장호원과 양평·안성까지 시야에 들어왔다.

 

봉수대가 있는 칼바위 주변이 성의 중심이다. 이 부근에 장수의 지휘소였던 남장대터, 팔각의 제사터가 있다. 본성 성벽둘레는 1㎞ 남짓이며 성벽의 높이는 2~3m이다. 동서북 3곳에 성문자리가 있으며 성벽을 돌출시킨 치성 4곳과 군사들이 마시던 우물터가 온전하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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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봉산성 사직단
성벽과 성 안에서 토기를 비롯해 철제 솥과 같은 취사용기와 쇠 화살촉 같은 무기류에 이르기까지 6세기 중엽부터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됐다. 남장대 터에서 신라 경문왕 때의 연호인 ‘함통6년(咸通六年)’이라 새겨진 벼루도 출토됐다.

 

이천은 한강유역에 터전을 잡은 백제의 영토였다. 이곳에 고구려 장수왕(394~491)이 백제 개로왕(455∼475)을 밀어내고 남천현을 설치한 것은 475년, 장수왕이 왕위에 오른 지 63년이 되던 해였다. 백제와 신라가 동맹을 맺고 고구려에 맞섰으나 장수왕의 남진정책은 계속됐다. 부왕 개로왕이 전사하고 수도 한성이 함락되자 문주왕(475∼477)은 신라군의 도움을 받아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천도했다.

삼국 중 백제의 문화를 가장 높이 평가했던 다산 정약용은 《아방강역고》에서 이때 백제가 한강유역을 포기하고 천도한 사실을 매우 안타까워했다. 한성시대의 백제를 가장 괴롭힌 외세는 말갈이었다. 백제가 한강 이남으로 천도를 단행한 것도 사실은 낙랑과 말갈 때문이다. 고구려나 신라 때문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후 백제는 다시 옛 영광을 되찾지 못하고 말았다.

 

고구려는 이천지역을 포함한 한강유역을 지키기 위해 설봉산성을 보강했다. 그러나 고구려는 이천지역을 오랫동안 지켜내지 못했다. 나제동맹을 맺고 무섭게 치고 들어온 신라에게 이천을 포함한 한강유역을 고스란히 내주고 말았던 것이다. 이때 한강유역을 차지한 신라는 당나라로 가는 바닷길을 열고 경기도의 곡창지대를 확보하면서 삼국의 강자로 부상했다.

 

538년, 백제 성왕(523∼554)은 웅진에서 사비(지금의 부여)로 천도하고 내정개혁과 관제정비를 서둘렀다. 성왕은 한강유역을 되찾기 위해 고구려가 안팎으로 시련에 처해 있던 시기를 놓치지 않고 가야까지 끌어들였다. 그리하여 551년에 백제 신라 가야의 삼국연합군이 총공격에 나서 고구려를 밀어붙였다. 연합전선의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백제는 고구려가 차지했던 한강 하류의 6군(郡)을 되찾고 신라는 한강 상류의 10군을 차지했다. 

한강유역의 탈환은 나제동맹군의 최대 승리였다. 그러나 신라가 553년(진흥왕 14)에 군사를 돌이켜 백제의 수복지인 한강 하류지역을 점령하고 거기에 신주(新州)를 설치했다. 진흥왕은 신주의 초대 군주에 가야출신의 왕족 김무력(金武力)을 임명했다. 백제와 신라의 동맹관계는 이로써 깨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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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봉호수
신라는 중국과 직접 교통할 수 있는 뱃길을 열고 한강 유역의 인적·물적 자원을 독점하는 전략을 강화했다. 

이듬해(554) 신라의 배신에 격분한 백제의 성왕이 신라를 정벌하기 위한 군사를 일으켰다. 처음에는 백제군이 우세했으나 관산성(충북 옥천)전투에서 신주의 군주 김무력에게 크게 패했다. 백제의 피해는 엄청났다. 성왕이 전사하고 3만 군사가 전멸했던 것이다. 이후 백제와 신라는 백제가 멸망하는 660년까지 1백여 년 동안 원수관계로 돌아서고 말았다. 신라는 한강유역의 심장에 해당하는 이천에 지방군사조직인 십정(十停)의 하나인 남천정(南川停)을 설치했다.

 

김유신(595~673)이 할아버지(김무력)가 활약했던 설봉산성을 찾았다. 한강유역을 되찾으려는 백제군을 막고 이천지역을 사수하기 위해서였다. 김유신은 남천정에서 장수들을 소집해 군사작전을 논의했다. 남천정이 바로 설봉산성이다. 이처럼 설봉산성은 지방행정조직과 군사요새를 겸한 복합공간이었다. 김유신은 설봉산성을 전초기지로 삼고 한강유역을 되찾으려는 백제의 집요한 공격을 물리쳤다.

 

7세기 중반, 이천 설봉산성은 신라와 백제가 사활을 걸고 전투를 벌이던 최전선이었다. 진흥왕의 증손자 김춘추가 고구려의 힘을 빌리려 연개소문을 찾았다가 오히려 구속됐다. 기지를 발휘해 겨우 고구려를 빠져나온 김춘추는 이번엔 당나라로 가서 고종을 만나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킬 것을 제안해 약속을 받아냈다. 654년, 김춘추(태종무열왕, 재위 654~661)가 왕위에 오르자 김유신은 당나라와 연합해 백제의 사비성을 공격했다.

 

나당연합군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자 당나라가 노골적으로 신라의 영토를 탐냈다. 김유신은 백제 유민들을 끌어들여 당나라 군대를 몰아내는데 온 힘을 쏟았다. 무열왕의 아들이자 김유신의 외조카 문무왕이 백제의 유민들을 적극 흡수하는 통합정책을 폈다. 이것이 신라가 최종 승리를 거둔 비결이다. 문무왕의 유언에는 김유신과 자신의 정치철학이 오롯이 담겨 있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사람과 죽은 사람 모두에게 상을 내렸고, 신라 사람은 물론이요 고구려와 백제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벼슬을 내려주었다. …변방의 성에 군대를 주둔시키는 일과 고을에 세금을 부과하는 일은 꼭 필요한 것이 아니면 모두 없애고, 율령에 불편한 것이 있으면 즉시 개혁하라. 나의 이러한 뜻을 사방에 두루 알게 하고, 담당자는 시행하라.”

 

설봉산성은 통일신라시대에도 사용됐다. 그러나 이때는 군사요새로서가 아니라 제사를 지내는 신성한 공간이었다. 참고로 설봉산성을 비롯해 하남 이성산성, 안성 망이산성, 포천 반월산성에서는 공통으로 제사를 지낸 흔적을 엿볼 수 있는 유물과 유구가 출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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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화봉과 칼바위
《삼국사기》를 보면 신라에는 산악신앙이 널리 퍼져 있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으며《구당서》에도 “(신라 사람들은) 산천에서 제사 지내기를 좋아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신라인들이 산천에서 지낸 제사는 두 가지였는데 조상에 대한 제사와 농경제사였다. 이처럼 설봉산성은 삼국통일 이후 조상에 대한 제사와 농사를 주제하는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신성한 공간으로 활용됐던 것이다. 이러한 유물이 바로 칼바위 부근에 있는 팔각의 건물터이다.

 

이천 시민들의 설봉산 사랑은 각별하다. 이천의 문화를 소개하는 잡지의 이름이 ‘설봉문화’이며 매년 10월에 열리는 축제의 이름도 ‘설봉문화제’이다. 설봉문화제는 설봉산성이 있는 칼바위 꼭대기에서 고신제를 지내며 행사를 시작한다. 설봉산은 이천사람들이 의지하는 진산이다.

 

설봉산에는 ‘서희봉’이 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서희(徐熙, 942~998)는 고려를 침략한 거란 대군을 담판으로 물리치고 강동6주를 되찾아낸 겨레의 영웅이다. 무더위가 물러가면 가족과 함께 설봉산에 올라 보자. 한강을 굽어보며 설봉산성을 배경으로 당나라를 물리친 김유신 장군과 이천이 낳은 위대한 외교가 서희 장군에 관한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들려주면 좋을 것이다.

 

이경석 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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