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지켜낸 경기도 산성을 가다] 22.안산 ‘별망성지’

250여년 서해 바닷길 지켜낸 철옹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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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벽
조선시대에 이중환(1690~1756)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성호 이익의 문인으로 문과에 급제해 촉망받는 관료로 성장하다가 영조가 즉위하면서 정치적인 사건에 연루돼 여러 차례 유배를 갔다. 이후 이중환은 전국을 다니면서 좋은 주거지를 구하는 마음으로 ‘택리지’를 지었다. 

이 책에서 이중환은 안산에 대해 서울과 가깝고 생선과 소금이 풍부해 대대로 살아온 사대부 집들이 많다고 소개했다. 안산은 ‘땅이 큰 바다에 접해있다’고 하듯이 바닷가에 인접해 있었다.

그래서 농사를 지으면서도 어업을 생산 기반으로 삼았기에 다른 지역에 비해 물산이 풍부했으며 생활도 그만큼 더 풍요로웠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 수군만호영 안산 초지량

안산은 경기도 중서부 해안에 위치한 곳이다.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차지했을 때에는 장항구현이라 불리다가 신라가 장악하면서 장구군으로 바뀌었다. 그러다가 고려 왕조에서 안산군 또는 안산현이 되었고, 조선이 건국된 후에도 ‘안산’이라는 지명을 그대로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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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읍지 1871년 제1책, 안산군 지도 옛 초지량이 있던 곳
안산은 고려 말 왜구가 한반도를 수 없이 침입했을 때 피해를 입은 지역 중 한 곳이다. ‘고려사’에는 1378년(고려 우왕 4)과 1379년에 침입했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이후에도 왜구가 오늘날 화성, 평택, 김포 등지에 침입해 노략질한 기록이 있으므로 아마도 안산에 왜구가 들어온 것은 두 차례가 훨씬 넘을 것이다.

 

별망성지는 현재 안산시 초지동의 반월염색단지 안에 남아 있는 성곽의 터다. 1979년에 경기도 기념물 제73호로 지정됐다.

 

현재 이 성터는 1988년에 길이 225m, 높이 1.45m 정도로 복원한 상태다. 바다에 근접해있는 야트막한 동산에 조성된 이 산성은 남쪽의 해안과 연결되어 있다. 현재 치성이 북쪽으로 향해 있으며 서쪽의 치성에서 바라보면 서북쪽으로 인천의 송도 방면이 조망이 된다.

 

이 성이 언제 축조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이 성이 자리한 초지량에 수군만호영이 있었다고 하므로 15세기 이전에 이미 쌓은 것으로 보인다. 이곳 초지량의 수군 기지에는 중대선(中大船) 5척과 예비군선 4척이 있었다. 그리고 직업 군인이라 할 수 있는 전문 수군이 8명이 있었고 각 고을의 선군 615명이 배속됐다.

 

■ 250여 년 동안 서해안의 방어 기지

현재 별망성이 자리한 초지량에 조선시대에 수군 기지를 설치한 이유는 왜구가 가장 먼저 들어오는 지점이었기 때문이다. 안산은 바닷길로 통하는 요충지로서 지난번에 소개한 화량진에 소속된 영이었다. 이 영은 화량진의 통솔을 받으면서 남양만을 거쳐 바닷가로 침입하는 외적을 방어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초지량의 수군만호영은 한 차례 이동이 있었다. 이곳이 수심이 깊지 않자 안산의 서남쪽 30리에 있는 사곶(沙串)으로 옮긴 것이다. 그런데 그곳마저 수심이 깊지 않아 배를 대기 어려운데다가 제물량과 멀지 않으므로 굳이 사곶에 수군 진영을 둘 필요가 없다는 지적이 나왔다. 그래서 1451년(문종 1)에 다시 원위치인 이곳으로 되돌아 왔다.

 

하지만 이 초지량의 수군만호영도 조선후기에 경기의 다른 수군 기지처럼 폐지되는 수순을 밟았다. 병자호란 이후 서해안의 해안 방어가 강화도를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이 초지량도 폐지되고 만 것이다. 

병자호란기 강화도가 함락당하는 과정을 지켜본 효종은 강화도의 방어에 적극적이었다. 그래서 경기 연안에 배치된 수군진들을 강화도로 옮겨 새로 정비했다. 그 결과 1656년(효종 7) 초지량도 제물진과 함께 강화도로 옮겨졌다.

 

이로써 250여 년간 서해 남양만의 바닷길을 지킨 초지량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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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쪽 방면 전망
■ 별망성에 대한 기록들

현재 별망성지는 한국전쟁 때에 대부분 파괴된 것을 일부 복원한 상태다. 성벽의 바깥쪽은 돌을 수직으로 쌓았고 치성도 동쪽과 서쪽 두 곳에 만들어 놓았다. 성벽의 안쪽은 흙을 다져 완만한 경사를 유지하고 있다.

별망성과 관련해 한 가지 짚어볼 사항이 있다. 바로 별망성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시대의 기록에서 ‘별망성’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이나 각종 지리지는 물론 현존하는 조선시대 안산의 읍지에도 별망성은 나오지 않는다. 조선시대 안산의 지도에도 ‘옛 초지량’ 또는 ‘옛날에 만호가 있던 초지량’이라는 설명만 있을 뿐이다. 다만 이 성터와 관련해 중요한 사실을 하나 전해주는 읍지가 있다.

1871년 안산군읍지에는 와리면 초지에 만호가 있었다가 중간에 강화로 옮겨갔다고 하면서, “와리면 성두의 높은 봉우리 위에 성곽의 자취가 남아있다. 예전의 산성 터인데 그 연대가 자세하지 않다”고 하였다. 

 

이와 유사한 기록은 ‘조선 보물 고적 조사 자료’(조선총독부, 1942)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 자료집에 실린 내용은 1916~1917년 사이에 조사한 내용이다. 이 자료집에서 경기도 수원군을 살펴보면 ‘군자면 초지리’의 성터 하나가 소개돼 있다. 

 

그 내용을 보면 “성벽은 석축으로 돼 있으며 높이는 4척에서 7척에 이르며 둘레는 약 600칸 정도이며 대체로 완전한 상태다”고 되어 있다. 

 

성곽의 규모를 당시 도량형에 따라 환산하면 성의 높이는 1.2~2.1m이며, 둘레는 1천92m 정도 된다. 두 자료를 통해 현재 별망성지로 불리는 이곳에 오래 전부터 성터가 있었으며 1917년 무렵까지 대체로 완전한 모양을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성곽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별망성이라는 명칭은 언제 어디서 유래하는 것일까? 

 

2011년에 새로 편찬된 ‘안산시사’에는 이와 관련해 두 가지 이야기를 전해준다. 하나는 초지진의 별망군(別望軍)들이 망을 보던 망루가 있던 곳이어서 별망이라 불렀다고 한다. 

 

다른 하나는 삼국시대에 어느 어부의 부인이 어린 자식을 업고 이 산등성이에 올라 고기잡이 나간 남편을 기다렸다. 남편이 풍랑으로 죽어 돌아오지 못하게 된 이후에도 이곳에서 먼 바다를 바라보았다는 이야기다. 

 

두 이야기의 공통점은 이곳이 바다를 바라본 곳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기록에는 남아 있지 않지만 언제부터인가 이곳을 별망으로 부르기 시작했으며 이 성도 별망성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현재로서는 지명의 유래와 성곽의 이름에 대해 세밀한 조사가 더 보완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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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안쪽 ‘별망성’
■ 별망성을 찾아서

현재 별망성지로 올라가는 길은 두 곳이 있다. 하나는 지에스이앤알의 맞은편에서 올라가는 길이다. 이곳에 주차장이 조성돼 있어 별망성지의 입구라 할 수 있다. 다른 한곳은 수도염직공업주식회사의 맞은편에서 올라가는 길이다. 여기에도 별망성지의 역사에 대해 설명한 안내판이 서있다. 여기에서 5~7분 정도 올라가면 별망성지의 동쪽 치성과 만나게 된다.

 

어느 쪽이든 별망성지에 올라서면 조금 난감한 생각이 든다. 이곳은 바다를 지키고 망을 보기 위해 쌓은 성곽이다. 하지만 현재 이것을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 안산이 산업화 과정에서 지형이 현재 많이 변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치성이 향해 있는 방향이 숲 쪽이어서 ‘별망’이라는 이름이 무색해진다. 

 

또 두 곳 안내판의 내용이 서로 다르며 문화재 지정 명칭도 같지 않아 혼동을 주고 있다. 별망성지의 입구에서 계단을 조금 올라가면 ‘별망성복원기원초석’(1987.5.24)이 있다. 제1회 별망제예술제에 즈음해 세운 비다. 이때 별망성에 대해 관심을 갖고 복원하면서 현재 이 정도나마 볼 수 있게 됐다. 

 

문제는 그 이후다. 한 번 더 복원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별망성에 대한 문헌과 구전을 더 수집하고 시민이 자주 찾을 수 있는 곳으로 더 정비되길 바란다.

 

정해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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