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고 찢겨도 포기 못하는 꿈… “우린 무예인 입니다”
우렁찬 기합소리, 절도 있는 동작, 날카로운 눈빛. ‘무예24기 시범단’이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지난 10년을 한결같이 해온 일이다. 누군가는 말한다.
“매일 보는 공연, 다른 거 없어?” 또 다른 누군가도 이야기 한다. “칼싸움 재밌네~.” 하지만 그들이 하고 있는 것은 단순 기예 공연이나 칼싸움이 아니다.
공연 도중 날이 선 칼에 얼굴을 베여도, 내달리는 말에서 내던져 저도 포기 못할 ‘꿈’이다. 변변치 못한 공연료 몇 푼에, 어릿광대라는 조롱을 받아도 지켜야 할 ‘신념’과 같은 것이다. 많은 것을 쉽게 포기하고 단념하는 것에 익숙해진 요즘, ‘포기란 없다’를 몸소 보여주고 있는 그들을 만나봤다.
■ 무예24기 시범단의 시작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 초반, 전국의 대학교에서 민족문화 부흥운동처럼 탈춤과 풍물, 민족무예 등이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무예24기 시범단도 그 중 하나였다. 당시에는 정조가 편찬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1790)>에 실린 24가지 군사무예를 익혔던 ‘24반 무예 경당’이라는 이름으로 전국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수원에서의 시작은 1999년이다. 전국의 ‘24반 무예 경당’ 수련자들을 모아 수원화성 연무대에서 ‘정조시대 전통무예전’이라는 행사를 개최했고, 이후 조금씩 발전시켜 나가다가 2002년 한일월드컵 개막식의 시범공연을 통해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렸다.
최형국 무예24기 시범단 상임연출은 “전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수련생을 모아 했던 정조시대 전통무예전이라는 공연이 우리의 시작이다. 한 200명쯤 됐을 것”이라며 “그때까지만 해도 무예24기가 화성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 다들 알지 못했지만, 이후 조금씩 연구하고 발전시켜 무예24기를 정립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2003년부터는 수원시를 본거지로 ‘무예24기 보존회’를 설립했고, 화성행궁에서 매일 시범공연을 선보인 건 일년뒤인 2004년 수원시의 지원을 받아 ‘무예24기 시범단’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면서 부터다. 그리고 지난해 수원시립공연단이 창단하면서 시립으로 활동하게 됐다.
그는 “감개무량하다. 지난 10년을 생각하면 아득하다. 참으로 힘든 시간들이 많았다”며 “그동안의 노력과 결실들이 이제야 조금씩 열매를 맺고 있는 것 같아 매우 기쁘다”고 밝혔다.
단지 무예를 좋아했던 청년들이다. 그들이 ‘시립’이라는 이름표를 달기까지 상황은 녹록치 않았다. 월급은 물론 4대 보험도 가입하지 못했다. 칼에 맞아 살이 찢어져도, 말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져도 병원에 가 치료받고, 진료비 내는 것은 각자의 몫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날까지 올 수 있었던 건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닌 자신 스스로 했기 때문이다.
최 상임연출은 “치료비는 부지기수고 애 분유값이 없어 무예를 못할 지경까지 놓인 선배들도 있었다. 생활과 무예를 이어가야 하니까 투잡은 기본이었다”며 “하지만 누가 말리겠나. 다 자기 업보라 생각하고 무예랑 살아온 것 같다”고 회상했다.
오늘날 시범단이 자리하기까지 그의 역할이 컸다. 그는 단순히 무예를 수련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무예24기의 역사를 고증하고, 무예24기를 통한 관광마케팅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수원 화성에서 만큼은 무예로 승부를 보고 싶었어요. 또 자본주의 사회에서 무예로 먹고 살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죠. 당시 경영학을 공부하고 있었는데, 역사학으로 전공을 바꿨어요. 무예24기를 제대로 공부하기 위함이었죠. 그렇게 2002년에는 ‘수원 화성의 전통무예를 통한 관광 마케팅 전략’을 석사 논문으로 썼죠.”
논문 발표만이 아니다. 단원들과 함께 수원시청에 찾아가 복사한 논문을 돌리고, 무예24기가 수원의 관광 상품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홍보했다. 그 결과로 일정 부분 시 보조금을 받아 상설공연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쉽지 않았어요. 하지만 포기는 안했습니다. 펄펄 끓는 날도, 이가 오들오들 떨리는 날도 행궁에 나갔어요. 그러니까 조금씩 알아주시는 분들이 생기더라고요. 또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을 가치 있게 바라봐 주시는 분들도 많아졌고요. 이제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 정조의 정신을 담다
무예24기는 조선 정조가 만든 24가지 군사무예다. 총 1천26개의 다양한 동작과 무기를 갖추고 있어 무예 운용의 변화가 무쌍하며, 크고 간결한 멋과 호쾌함을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 형성과정에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실전적 전투경험을 통해 검증됐으며, 한중일의 무예를 연구ㆍ분석해 재창조됐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크다. 오늘날에는 각 무예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무예도보통지>에 그림과 함께 실려 전해 내려오고 있다.
시범단은 상설공연과 더불어 무예도보통지를 바탕으로 무예24기를 연구 및 계승ㆍ발전시키고, 국내외에 널리 보급ㆍ전수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무예24기를 보다 친숙하게 선보이기 위한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지난 3월 조선시대 왕의 명령으로 실시했던 무과시험인 ‘관무재’를 재구성한 공연 <관무재, 조선의 무예를 지켜보다!>를 기획해 수원, 인천, 충남 태안, 전남 남원, 강원 강릉 등을 순회했다. 또 수원의 자매결연 도시인 일본 후쿠이시에도 찾아가 알릴 예정이다.
여기에 지난 7월에는 정조의 일대기를 그려낸 수원시립공연단의 창작뮤지컬 <정조>에도 참여하는 새로운 도전을 했다. 하지만 늘 고민이 따른다.
“사실 항상 고민하고 있어요. 무예를 위한 공연을 할 것인가, 공연을 위한 무예를 할 것인가. 너무 극과 극의 문제예요. 살아남으려면 공연화된 시스템이 필요해요. 산 속에서만 살 수는 없잖아요. 그렇다고 전통을 훼손할 순 없죠. 그 중심축을 잃지 않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죠.”
시범단이 ‘공연’이 아닌 ‘시범’을 펼치는 이유다. 공연을 선보이더라도 무예의 정신을 오롯이 담아낸다. 수원 화성을 지키고자했던 정조의 정신과 무예의 본질적 가치를 공연에 담아낸다.
“이런 고민들이 보이지 않으면 원숭이를 내보내면 되죠. 폼 나잖아요. 근데 그걸로 흘려버리면 본질적 가치가 사라지겠죠. 무예24기가 생겨난 배경과 역사, 정조의 마음과 의지들이 시범에, 공연에 투영돼 있어야 합니다.”
시범단은 이제 첫 단추를 끼웠다고 한다. 시립을 넘어, 도립으로, 국립으로 가기 위해 매진한다는 각오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직 해결해야할 일이 많다. 전수관 건립이 그중 가장 어려운 일이다.
“이제는 시범단이 수원 화성을 알리는데 다양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전국 어느 곳을 가도 이런 시범단은 없죠. 그런 것들이 이젠 전수관이라는 안정적인 시스템을 통해 보급됐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더 좋은 자원들이 오고, 더 좋은 무대를 선보일 수 있죠.
또 시민들과 보다 가까워져야 해요. 왜 중국에 가면 공원에서 기체조 하잖아요, 수원 시민들도 언제 어디서나 무예24기로 몸과 마음을 수련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미 시민들을 위한 보급형 체조도 만들어 놨어요. 하지만 함께할 공간이 없습니다. 이런 부분들이 해결돼 무예24기가 수원의 상징으로 돈독하게 자리 잡을 수 있길 희망합니다.”
송시연ㆍ권오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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