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지켜낸 경기도 산성을 가다] 27. 연천 무등리 2보루

1500년 긴잠 깬 ‘철갑옷’… 최강 고구려 기병 함성 들리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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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보루 남쪽 성벽과 무등리 1보루
경기도 연천군 왕징면에 위치한 무등리 2보루는 임진강변에 있는 고구려 성곽의 하나다. 

과거 군남면 진상리와 왕징면 무등리 사이를 잇는 유연나루 일대를 통제할 수 있는 임진강 서편에 위치한다. 

현재 이곳 남쪽에는 372번 지방도상에 군남면과 왕징면 간을 연결하는 무등리 2보루는 해발고도가 93m로 그리 높지 않은 구릉 위에 있지만 강에 연해 급경사면을 이루고 있어 방어가 용이하고 강 건너편의 움직임 또한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전략적인 요충지이다. 

무등리 2보루의 석축 성벽은 이미 훼손된 동쪽 급사면과 서쪽 계곡부를 제외한 전 구간에서 확인된다. 

남한의 다른 고구려 보루와 같이 구릉의 정상부에 경사면을 석축성벽으로 둘러쌓아 축조한 소규모 산성으로 전체 성벽 둘레는 350m에 해당된다. 보통 보루란 성곽 둘레 600m 이하의 소규모 성을 일컫는다. 무등리 2보루는 1보루와는 북쪽으로 300m가량 떨어져 있다.

2011년 발굴조사를 통해 온전한 갑옷 한 벌이 출토돼 당시 동북아시아 최강의 고구려 기병 역사를 확인할 수 있는 유적으로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유적, 바로 이 무등리 2보루이다.

 

■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하천, 임진강

삼국시대 연천지역은 4세기에 낙랑군과 대방군이 축출되면서 고구려와 백제의 접경 지역이 됐을 가능성이 높다. 이후 연천은 고구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의 남진정책으로 고구려로 편입된다. 

연천을 포함한 한강유역에 대한 고구려의 본격적인 진출은 475년으로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따르면 장수왕 63년에 왕이 직접 군사3만을 거느리고 백제를 침략해 한성을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죽인 후 남녀 8천명을 사로잡아서 돌아간 기록이 남아있다. 고구려 군은 백제의 한성, 몽촌토성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금강유역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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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 무등리 2보루 항공사진
고구려는 한반도 중부지역뿐 아니라 만주 땅을 차지해 명실 공히 동북아시아의 최강의 자리를 지켰던 고구려의 전성기였다. 이후 551년 백제와 신라, 가야 연합군에 의해 고구려는 다시 북쪽인 임진강과 한탄강 유역으로 쫓겨 가게 된다. 

즉 임진강 유역 강을 경계로 서쪽에는 고구려성이, 동쪽에는 신라성이 분포하고 있어 고구려가 멸망하는 668년까지 임진강은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선 역할을 하게 된다. 

즉 6세기 중엽 이후부터 고구려는 임진강 일대를 최남단 국경으로서 호로고루, 당포성, 은대리성 등 3대성과 덕진산성 그리고 이들 성을 연결하는 10여개의 보루들로서 신라에 대항했다. 그중 국경사령부 역할은 호로고루가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군수기지로서 바로 무등리 2보루가 있었다.

 

■ 무등리 2보루의 발굴 조사

현재 연천지역에서 발견된 다른 고구려 유적들과 같이 무등리 2보루 역시 그 존재가 알려진 것은 불과 20여 년 전의 일이다. 1991년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실시한 군사보호구역 내 지표조사에서 처음 보고됐다. 

1998년에는 6~9세기에 해당하는 탄화미와 탄화조 등의 곡물이 발견돼 고구려 군창의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했다. 2000년대 후반에 들어 국립문화재연구소와 경기도가 마련한 ‘고구려 유적 종합정비 계획’에 따라 고구려 유적과 유물이 확인되는 유적으로서 조사 및 보호조치가 필요한 유적으로 분류된 바 있다.

 

그 후 연천군이 서울대 박물관과 함께 지난 2010년부터 2012년까지 3차에 걸쳐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성곽의 규모와 형태, 축조방식 등이 밝혀졌다. 유구로는 석축성벽, 치 2기, 방형석축 유구와 축대, 배수로 등이 확인됐으며 유물로는 찰갑 한 세트(투구와 갑옷 상의), 탄화곡물, 토기와 철기류 등이 출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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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등리 2보루 북쪽 치(雉)
■ 특이한 축조 방식과 갑옷의 발견

무등리 2보루는 구릉 정상부의 사면을 석축 성벽으로 둘러쌓고 다시 내부에 정상부의 사면을 따라 석축을 쌓아 만들었다. 성벽과 보루 내부는 훼손이 심해 기초부를 제외한 관련 구조물이 거의 남아있지 않지만 오히려 이 때문에 성벽의 축조상태를 온전히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남한 내 고구려 보루와는 달리 대강 다듬어진 석재와 점토를 함께 활용해 성벽을 쌓는 특이한 축조 방식도 확인됐다.

 

성벽의 외면에는 비교적 두텁게 점토를 덧대어 석축이 무너지지 않도록 한 것이다. 성벽 아래쪽에는 여러 기둥 구멍과 구덩이가 확인됐는데 아마도 성벽이나 뒷채움 구간을 지탱하는 영정주 흔적일 가능성이 크다. 

무등리 2보루에서는 다른 고구려 관방유적과 달리 출토 유물의 수량은 많지 않다. 아마도 의도적으로 유적을 폐기했을 가능성이 큰 이유다. 기와 편이 발견되긴 했지만 불과 몇 점에 불과해 기와 건물지가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토기 역시 수량이 많지는 않은데 양상은 대체로 아차산 보루군과 유사하다.

 

무엇보다 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돌확 옆에서 고구려 장수의 갑옷인 찰갑 수백편이 투구와 함께 그대로 주저앉은 채 발견돼 학계와 언론에 관심을 끌었다. 이처럼 완전한 형태로 발견된 고구려 갑옷은 그동안 중국이나 북한에서도 발견된 예가 없었기 때문이다. 발견된 예로는 중국 길림성 우산하 고분군 41호묘와 환인 오녀산성 등 일부 유적에서 일부 찰갑편이 출토됐을 뿐이다.

 

이 밖에 남쪽 성벽과 북쪽 치 옆에서 망태형 철기가 출토됐는데 역시 그동안 발견된 사례가 드문 것이다. 또한 무등리 2보루에서는 탄화미와 탄화조도 다량으로 확인됐는데 곡물 저장 창고가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 동북아시아의 최강, 고구려 기병

재위 22년 동안 정복전쟁을 통해 고구려의 영토를 확장한 광개토 대왕은 신라, 백제, 가야 등을 신하의 나라로 거느리며 고구려 천하를 완성했다. 

광개토 대왕은 ‘영락’이라는 연호를 사용하며 중국 황제와 대등함을 과시했듯 당시 고구려는 동북아시아의 일인자, 천하의 중심이었다. 이를 뒷받침하는 데는 최강의 고구려 기병이 있었다.

 

고구려의 기병은 말과 함께 갑옷으로 무장하고 4미터가 넘는 긴 창을 들고 내달리며 적군을 압도했다. 찰갑이라 부르는 고구려 갑옷은 네모 모양의 작은 철판 조각을 가죽 끈으로 이어 붙여 만든 것으로 철판 조각의 뒷면에도 가죽을 대어 붙였기 때문에 화살이 쉽게 뚫고 들어올 수 없었다. 

칼과 창 또한 훨씬 질 좋은 강철로 만들어져 있었다. 무등리 2보루에서 유일하게 발견된 찰갑과 투구 그리고 세계적 수준의 제철 기술 흔적은 이를 반증하고 있다.

 

■ 세계적 수준의 제철 기술이 발견된 무등리 2보루

무등리 2보루에서 무엇보다 주목되는 것은 바로 배수로에서 출토된 다량의 철재 및 제철관련 유물이다. 제철관련 유구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집수시설과 연결된 배수로에 제철관련 유물들이 집중 폐기돼 있었고 그 외 성벽 주변에도 부분적으로 채집됐다. 

출토된 유물들은 철기 편과 슬래그가 다량 수습된 것이다. 슬래그란 철을 만드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찌꺼기를 일컫는다. 

이들 유물들을 금속학적으로 분석한 결과 유구의 위치나 철재의 성격 등을 고려했을 때 제련공정보다는 단야공정이나 초강정련 공정이 이뤄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사철을 원료나 탈탄제로 사용한 초강소재의 철기편과 초강정련 시 발생한 철재들로 밝혀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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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등리 2보루 출토 갑옷 현장 보존처리 모습
철광석을 제련하면 크게 괴련철과 선철을 얻을 수 있는데 그것을 선별해 괴련철은 단야공정을 거쳐 단조철기의 원료가 되며 선철은 용해해 주조철기로 제작된다. 선철은 탄소함량이 높아 쉽게 부러지므로 단조할 수 없으나 초강정련을 거쳐 탄소함량을 낮추면 단조 가능한 강소재로 만들 수 있다. 이때 초강정련이란 선철에 탄소함량을 낮추기 위한 탈탄제로 철광석 분말을 투입해 강을 생산하는 방식을 말한다. 

무등리 2보루에서 출토된 철재 분석을 통해 초강기술이 존재했음이 확실해졌다. 또한 초강소재로 제작된 철기편에서는 철기의 성질을 개선하고자 열처리기술(담금질)이 적용된 것도 확인되었는데 이는 당시 초강기술과 함께 철기제작기술이 상당히 높은 수준에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즉 고구려는 석축기술과 함께 철기제작 기술도 가히 세계적이었음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높은 수준의 철기제작 집단이 작업장이었던 무등리 2보루 유적은 단순히 요새와 같은 보루의 성격을 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음이 틀림없다. 즉 당시 이 지역에서 주변의 성과 보루에 철기 내지는 철소재를 공급하는 중요한 군수기지적 거점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무등리 2보루는 한국제철사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무등리 2보루는 임진강변 구릉에 위치한 보루 유적 중에 유일하게 발굴조사가 이뤄진 최초의 고구려 유적이다. 이 유적에서 출토된 완전한 형태의 고구려 갑옷과 철재 유물들로 미루어 보아 무등리 2보루는 당시 최고 기술의 철기 제작 장소로서 고구려 최남단 군수기지 역할을 한 중요유적임에 틀림없다.

 

윤미숙 연천군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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