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천년 학술토론회] 경기도는 개혁사상과 정신문화의 발원지

율곡 이이·성호 이익… 조선 개혁 이끈 ‘사상의 고향’
변화·개혁의 중심지 경기도, 대한민국 새천년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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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연구원·경기일보 공동주최 ‘경기천년 기념 제2회 학술토론회’가 경기도는 개혁사상과 정신문화의 발원지란 주제로 26일 파주 경기도율곡교육연수원에서 열렸다. 참석자들이 토론에 앞서 이율곡 묘소를 답사하고 있다. 오승현기자
경기도는 과거 1천년 전부터 시대를 주도하는 개혁사상과 정신문화를 이끌어왔던 지역이다. 경기도를 중심으로 활약했던 과거 인물들은 사회의 기득권을 타파하고 시대를 변화시키기 위한 변혁을 꿈꿔왔다. 

오는 2018년, 경기천년을 앞두고 경기도를 배경으로 당시 사회상을 변화시키고자 했던 율곡 이이, 성호 이익 등의 모습을 되돌아보면서 새로운 시대를 준비해야 하는 경기도의 미래 비전을 조명했다. 

본보와 경기연구원이 주최하고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가 후원한 경기천년 기념 제2회 학술토론회 ‘경기도는 개혁사상과 정신문화의 발원지’가 지난 26일 이이 선생의 근거지였던 파주 율곡교육연수원에서 열렸다.

 

이날 토론회에는 구미정 숭실대 교수가 ‘실천적 지식인 율곡 사람 이이’라는 주제 발표를 통해 경기도를 중심으로 시대의 변혁을 꿈꿔왔던 이이 선생의 사상과 그의 삶을 재조명했으며, 김병기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이 ‘성호 이익과 성호학파의 사람들’ 주제발표에서 실학의 근원지가 된 성호학파 인물들과 남한강 일대의 학맥을 되짚어봤다. 

박규환 KC대학 교수는 ‘변혁의 산실, 경기도’ 주제발표에서 과거 경기도 사람들이 체제와 이념을 넘어서고 해방과 변혁의 이야기를 품고 키워냈던 내용을 들여다봤다.

 

사회를 맡은 박정신 전 숭실대 교수는 “역사는 어제의 학문이자, 오늘의 학문, 내일의 학문”이라면서 “학문의 경계를 넘어서 경기 천년의 미래를 내다보는 일을 위해서는 과거를 들여다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이번 학술토론회의 의의를 설명했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은 인사말에서 “경기도를 근거지로 한 기호학파 인물들은 강한 개혁 지향성과 진보성을 갖고 있는 등 한국사회에서 장구한 세월동안 개혁성향을 가져왔던 유일한 집단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들에 대해 집중적인 연구와 토론이 이뤄진 적은 없었다”며 “이번 학술토론회는 과거를 내다보지만 앞으로의 경기도의 천년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를 점검해 보는 학술토론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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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성관 전 광주과학기술원 총장,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등 참석자들이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다.
■ 실천적 지식인 율곡 사람 이이-구미정 숭실대 교수

율곡(栗谷)이라는 말은 그가 살던 마을, 곧 ‘율곡 마을’을 가르킨다. 이이는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났지만 여덟살 때 파주로 이주했다. 이 곳은 아버지 이원수(李元秀)의 고향이자 덕수 이씨의 본거지로, 파평면에 자리한 율곡, 곧 밤나무골이 이이의 새로운 삶터가 됐다.

 

당연하게도 율곡 이이는 율곡 사람이다. 이 장소를 자신의 호로 삼을 만큼 그의 애정은 각별했다. 관직에 있다가 물러나기를 밥 먹듯이 할 때고 이이에게 율곡은 언제든 돌아가 생의 쉼표를 찍는 ‘부메랑’ 같은 장소였다. 명실상부 ‘경기도인’인 그는 현재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 자운산 기슭에 묻혀 있다.

 

어머니 신사임당의 행장(일대기)을 기록한 그가 아버지의 행장을 쓰지 않았다는 점만 고려해도 그에게 어머니의 영향력이 얼마나 지대했는지 알 수 있다. 율곡은 행장에서 신사임당이 바느질과 자수 등 흔히 ‘여성의 일’로 알려진 부문에서만 탁월했던 것이 아니라 어려서부터 경전에 능통했으며 글과 글씨에도 뛰어난 재주를 보였다고 서술함으로써 신사임당을 이른바 ‘경계를 가로지르는 인문학자’로 평가했다.

 

율곡은 어머니의 일대기를 담은 ‘선비행장’을 쓰면서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행장이 해당 인물의 성만 밝힐 뿐 이름과 휘를 거론하지 않았던 통속의 길을 따르지 않고 신사임당을 하나의 ‘주체’로 설정했다. 사사로운 이(利)를 좇지 않고 공공의 의(義)를 추구하는 신사임당의 정치 감각은 율곡에게 그대로 이어졌다. 율곡의 가치관과 세계관 형성에 토대가 됐다는 점에서 신사임당은 어머니이기 이전에 좋은 스승이었다.

 

율곡이 살던 시대는 조선 중기로 건국 후 200여 년이 흐르는 사이에 각종 사회적 부조리가 난무하던 때였다. 특히 백성들의 고통이 극에 달했다. 조선 경제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토지제도가 문란해져서 토호들은 공전을 겸병해 부를 확대한 반면 실경작자인 영세농은 수확의 대부분을 수탈당해야 했다. 정치적으로는 사림들의 입지가 무척이나 축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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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석자들이 율곡 이이 유적지를 둘러보고 있다.
유학자들이 현실정치를 멀리하고 개인적인 수양과 사색 위주의 학문 경향속으로 도피하게 된 것도 충분히 있음직한 일이다. 경치 좋은 삼림에 자리한 서원에 틀어박혀 혼탁한 세상으로부터 자기를 봉쇄한 채 고고히 마음을 닦는 이른바 수신(修身) 담론이 유행했다. 퇴계(退係) 이황(李滉)의 ‘위기지학(爲己之學)’이 이러한 노선을 대변한다.

 

이에 반기를 든 것이 율곡의 ‘위인지학(爲人之學)’이다. 학문의 목적은 어디까지 널리 사람을 위한데 있지 자기 만족적 관념의 유희가 아니라는 뜻이다. 진정한 유학자는 백성과 더불어 태평세상의 꿈을 나누며 그런 세상을 열어가기 위해 분투하는 이다. 율곡의 위인지학은 비단 학자에게만 적용되는 덕목이 아니라 임금에도 해당됐다. 

뜻을 세워 학문에 힘쓰고 인재를 적절한 자리에 등용해 바른 정치를 펴서 임금의 어진 손길이 온 백성에게 두루 미치도록 해야 한다. 이른바 왕정체제 아래서 학자-정치가가 자신의 뜻을 펼치기 위해서는 임금을 설득하는 일이 필수였다. 율곡이 그토록 많은 상소문을 올린 이유도 그 때문이다. 율곡은 언제나 임금에게 충언하는 강직한 신하의 본분을 다했다.

 

율곡의 정치적 사고는 언제나 곤궁에 처한 백성의 삶을 어떻게 하면 개선시킬 수 있을 것인가에 집중돼 있었다. 이점에서 그는 제도개혁을 통해 퇴계류 지식인들과 분류되며 조선 후기 실학에 맞닿아 있다.

 

율곡의 ‘생민(生民)’ 전략은 진상과 공물의 간소화 등으로 구체화된다. 군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백성의 희생을 전제로 국부를 늘리는 데만 혈안이 되면 안된다는 율곡의 생각은 수많은 상소문에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율곡은 서얼과 천민에 대한 관심도 남달랐다. 심지어 노비조차도 보호받아야 할 백성이라는 그의 생각은 대단히 파격적이다.

 

경기도 파주가 낳은 실천적 지식인 율곡이 오늘 우리 시대에 말하는 것은 “모든 것이 가만히 있는 곳이 지옥”이다. ‘돌들이 소리 지르기 전’에 사람이 먼저 깨어나 소리쳐야 한다고. 신자유주의 세계경제의 폐해가 고스란히 사회적 약자에게 전달되는 이 때, 탐욕스런 죽음의 항해를 멈추기 위해서는 율곡의 혜안이 필요하다. 스스로 낮은 곳에 임해 힘없는 약자들과 눈높이를 맞춘 채 이들을 보살피고 사랑하는 일이 ‘항상 시무’임을 온몸으로 보여준 그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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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호 이익과 성호학파 사람들-김병기 대한독립운동사편찬위원장

성호(星湖) 이익(李瀷)은 18세기의 대표적 실학자이다. 그는 많은 저술을 남김으로서 높은 학문적 업적을 이뤘다. 사서삼경 등 유교의 기본 경전을 비롯하여 ‘소학’, ‘효경’, ‘근사록’, ‘심경’ 등에 관한 질서는 그의 경학의 요체를 말하는 것으로, 궁극적으로는 ‘경세치용(經世致用)’을 목표로 한 것이다.

 

이익은 야인으로 살았기 때문에 당시 피폐한 농어촌 생활의 실정을 절실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따라서 그의 학문 세계는 천문, 지리, 인사, 치도(治道) 뿐 아니라 금수, 초목, 산율, 음양, 의약, 복서 등은 물론 서양의 과학사상과 천주교에 대해서까지 높은 식견을 보였다. 학식의 해박함, 사상의 진보성, 규모의 주밀함과 명확함이 당대의 독보적인 학문을 이뤘기에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실학 사상가라고 할 수 있다. 

성호학파란 성호 이익에서 시작돼 학맥을 이룬 조선 후기의 학파를 말한다. 이들은 흔히 근기학파 또는 경세치용학파라고도 말한다. 성호는 퇴계 이황의 정통 성리학을 받아들였으나 이후 허목과 유형원으로부터도 영향을 받아 혁신적인 학문체계를 이뤘다. 

서학(西學)에도 관심을 보여 유교이념에 배치되지 않는 교리에 대해 동조했지만 천주나 지옥 등의 교리 등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정치분야에서는 법제의 정비를 촉구했고 과거제 및 지주전호제의 개선을 주장했다. 또 역사학 분야에서는 민족사의 체계를 수립하는 문제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다.


성호 이익으로 대표되는 ‘기호남인’의 새로운 학풍은 퇴계 이래 정통성리학의 도통을 계승함을 물론 조선 후기의 새로운 정치적 상황과 함께 이른바 ‘실학’이라 불리는 새로운 학문 사상으로 발전했다. 이익으로부터 시작되는 기호남인들을 특히 ‘근기남인(近畿南人)’이라 부르기도 한다.
기호남인의 실학 연구는 성호 이익으로부터 시작된다. 

그의 제자인 안정복, 권철신ㆍ권일신 형제, 정약전ㆍ정약용 형제, 이가환, 이벽 등이 성호학파의 일원으로 남한강을 중심으로 18세기에 펼쳐진 학문과 사상의 주류를 이뤘다. 

성호학파는 ‘백과전서파’라고 불릴 정도로 다양한 성향의 학자들이 모여 각자의 전공 분야에서 개성이 넘치는 학술활동을 전개했다. 윤동규와 신후담, 이병휴는 경전 해석 분야에서, 안정복은 역사학 분야에서, 이중환은 인문지리학 분야에서, 이가환은 천문학과 기후학 분야, 권철신은 서학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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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은 집안이 당쟁에 의해 몰락하자 평생 벼슬길을 포기했다. 그리고는 선영이 있는 안산 첨성촌의 성호라는 호숫가로 은거해 학문연구에 몰두했다. 

이익은 일찍이 중형 이잠으로부터 개혁적인 학문을 배우고 이를 실천의 학문으로 만들어 갔다. 그는 지배층의 눈이 아니라 민중의 눈으로 세상을 보았고, 그 결과 불평등한 토지문제, 신분문제 등에 주목했다. 이런 점에서 이익의 학문은 당대 사상계의 혁명이었다.


18세기 남한강 유역을 비록한 광주지역을 중심으로 등장한 많은 실학자들 가운데 잘 알려진 성호 이익이나 안정복, 권철신ㆍ권일신 형제, 이벽 등은 모두 근기남인 출신이다. 

이익은 어려서부터 안산 첨성촌에 거주한 이래 한번도 다른 곳으로 이사한 적이 없었고 안정복은 1736년 무주에서 광주 텃골로 이사한 이후 낮은 관직에 나가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이곳을 떠난 적이 없다.


이들 기호남인들은 남한강을 중심으로 혼맥과 지연이 얽히면서 학파를 형성하게 됐다. 당시 남인 학자들은 지금의 양평, 마재 등 남한강 일대에 모여 살면서 학맥을 이어간 것이다.


정약용 형제가 살던 곳은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수되면서 다시 경안천이 흘러 들어오는 능내리 마재(지금의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였다. 권철신ㆍ권일신 형제는 양근(양평군 강상면 세월리 대감마을)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권일신의 장인인 안정복은 광주 경안 덕곡(광주시 동부면 배알미리)에 살았다.


정약용은 해배되어 고향 마재로 돌아온 이후 인근에 거주하던 신작, 김매순, 홍석주와 같은 당대의 학자들을 만날 수가 있었다. 정약용이 고향에서 만난 학자들은 당대의 학계를 주도하던 최고 수준의 학자들이었다. 

정약용은 이들과 학문 논쟁을 벌이고 새로운 정보를 접하면서 자신의 학문을 심화시킬 수 있었다. 남한강 유역은 기호남인들의 근거지면서 이를 통해 당대의 학문과 사상의 소통을 이뤘음을 알 수 있다.


성호의 학문은 성호(聖湖)라는 그의 호(號)처럼 하늘에 흩어져 있는 별과도 같은 학자들이 한곳, 성호 이익이라는 큰 호수에 모여 이뤄낸 학문적 성과라고 할 수 있다.


■ 변혁의 산실-박규환 교수
두번의 참혹한 전쟁을 겪고도 반성과 사과는 커녕 조선 정부와 지배층은 오히려 질서의 고삐를 다잡았다. 예학(禮學)의 이름으로 사대부 중심의 신분 질서와 가부장주의를 곧추세우고 온갖 종류의 주민 통제 체제와 부세를 통해 수탈을 강화함으로써 민생을 진구렁에 빠뜨렸다. 

광작이나 도매상업 등을 통해 부농과 거상이 출현함으로써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던 소농이나 영세 상인조차 몰락했으며 상품 경제의 성장에 따라 화폐에 대한 욕망이 높아지자 그에 맞춰 착취 또한 더해간 말그대로 ‘헬조선’이었다.


그렇지만 삶의 영역을 넓히되 그 과정에서 만나는 온갖 칸막이를 허물며 서로 더불어 사는 길을 찾아온 것이 인류가 걸어온 길로, 그 칸막이를 비집고 틈을 낸 이들이 우리가 ‘성호 좌파’로 부르는 경기 지방에 살던 지식인들이다. 여주ㆍ이천ㆍ양근ㆍ광주 일대에서 성호 이익과 그의 문도들을 중심으로 조심스럽게나마 주자학 질서를 비집는 새로운 기운이 싹을 틔웠다.


율곡의 학설을 추종하면서 주기론의 경향을 띠는 기호학파는 다른 한편으로 양분됐지만 16세기 말부터 영남 사림 가운데 특히 한강 정구를 잇는 학자들이 출사해 서울과 경기도 지방으로 근거지를 옮기면서 기호남인을 형성하게 됐다. 이들은 북인(北人) 학통을 흡수하면서 영남 남인과는 생활근거지뿐 아니라 학문 성향에도 차이를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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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연구원·경기일보 공동주최 ‘경기천년 기념 제2회 학술토론회’가 26일 파주 경기도율곡교육연수원에서 경기도는 개혁사상과 정신문화의 발원지를 주제로 열렸다. 허성관 전 광주과학기술원 총장,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등 참석자들이 기념촬영 하고 있다.
영남 남인은 퇴계의 적통을 자부하면서 이기심성론 등을 주자 성리학의 문제에 천착했다. 반면 기호 남인은 원시 유학의 육경 중심의 학풍을 형성하고 재야의 비판 학문으로서의 성격을 뚜렷이 하면서 18세기에 이르러 성호학파를 형성, 주자 성리학의 관념화와 예학의 의식화를 비판하고 토지 제도와 행정 기구 개편과 같은 제도 개혁, 폐정 혁신을 주장했다.


성호학파는 이익 이후 안정복으로 이어지는 성호 우파와 권철신으로 이어지는 성호 좌파로 나뉘는데 성호좌파는 마침내 주자학으로부터 이탈해 양명학을 수용하고 뒷날 천주교 신앙 운동으로까지 나아간다. 양명학을 수용한 성호 좌파 지식인들은 실제로 “도학(道學)의 이름을 가장해 사사로운 이욕을 취하는 자야말로 이단의 죄를 범한 사람”이라며 당시 주자학의 위신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주자학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성호 우파의 학자와는 달리 이들은 치용(治用)에도 적극 나서 스승의 경세론을 계승ㆍ발전시키며 조선 후기 실학의 한축을 형성했다. 성호 좌파 지식인들은 통념이나 평판 따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양지에 비추어 옳은 바를 실행에 옮기며 그들이 꿈꾸는 세상을 향해 나아갔다. 

주자학 질서가 세워 놓은 칸막이를 비집고 새로운 세상을 추구한 것이다. 그것은 두번의 전쟁 이후 조선사회가 노정하는 온갖 사회문제, 그리고 그 모든 문제를 관통하는 근본 모순을 해결하려는 주체의식과 주체적 실천의 산물이었다.


양명학을 수용한 성호 좌파 지식인들은 곧 천주교로 기운다. 양명학을 통해 주자학의 틀을 벗어난 유교 지식인들이 유교와는 전혀 다른 세계관, 전혀 다른 사유세계를 지닌 천주교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반상ㆍ문벌ㆍ적서의 차별은 물론이고 땅을 둘러싼 생산관계며 재화의 유통과 백성의 복리 문제를 해결해 ‘만가성인’의 공동체를 이루고자 했던 지향이 유교를 넘어 천주교로 향한 것이다.


천주교 신앙은 성호 좌파 양명학자뿐 아니라 최창현ㆍ김범우ㆍ최인길ㆍ지황 등과 같이 중인에 속하는 역관들이나 의원(議員)들에게도 전교ㆍ수용됐다. 

이들은 해외 나들이를 통해 세계 질서의 변화를 감지하고 있었기에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 상승을 제약하는 낡은 봉건질서를 청산해 줄 이념으로 천주교에 더욱 적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경향은 여성, 천민 등 하층으로 내려갈수록 강화됐고 이는 신분제도를 비롯해 조선사회를 지탱하는 모든 구조와 가치에 대한 전면 부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 점에서 천주교 운동은 사회ㆍ정치적 개혁 또는 혁명운동으로 나아갈 잠재성을 지니고 있었다.


■ 종합토론
주제발표 이후에는 △김동환 국학연구소 연구위원 △김명옥 건국대 교수 △김소희 아시아문화연구원 연구원 △이수행 경기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임연규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기획실장 △임종권 한국국제학연구원장 △정암 전 관동대 교수 △조의행 신한대 교수 △허성관 전 광주과학기술원 총장 △황금회 경기연구원 연구위원 등이 참여한 토론회가 진행됐다.


토론회에서 조의행 교수는 주자학이 가지고 비판의 여지 외에도 오늘날에 되살려도 될 만한 가치 여부를 판단해봐야 한다는 의견들을 제시했다.


김소희 연구원은 율곡 이이가 경기도의 개혁사상과 정신문화의 힘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인물이긴 하지만 수백년이 흐른 현 시대가 과거와 사회문화적, 정체경제적 특성이 다르기 때문에 당시의 율곡 이이가 생각했던 대안과 정책이 지금 어떻게 대한민국에 기여할 수 있을 지에 대해 연구해 봐야 한다고 제언했다.


임종권 원장은 율곡 이이에 대해 주자학에 충실했지만 오늘날에도 보기 드문 진보적이고 혁명적인 사상을 피력한 인물로 평가하면서 탁상공론에만 머문 것이 아닌 현실적인 문제 해결에 많은 노력을 해왔고 특히 남녀 평등사상을 주장한 것을 예로 들었다.


임연규 실장은 조선 후기 경기도의 주요 사상가들이 하나같이 나라와 백성들을 위한 세상을 만들려는 이론과 의지를 보인 강한 개혁성향의 인물들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며 따라서 경기도가 역사적으로 품어야 할 개혁과 독립투쟁의 고장이라는 자부심이 오늘을 사는 지표가 될 수 있도록 연구하고 선양하는 작업이 계속돼야 한다고 조언했다.

 

정진욱기자
사진=오승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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