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성산 능선 굽이굽이… ‘흥망성쇠’ 1700년 역사 품은 요새
하차한 곳은 군내면 구읍리 면사무소 앞 조선시대에 포천의 관아가 있었던 곳인데 뒷산이 반월성이 있는 청성산이다. 사적 제 403호로 지정된 포천 반월성(半月城)은 반월이란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청성산 능선을 따라 반달 모양으로 성벽을 쌓은 테뫼식 석축 산성이다.
산성으로 오르는 길이 시멘트로 포장돼 걷기가 아주 수월하다. 남문 초입에 서 있는 느티나무 세 그루가 반월성의 역사를 대변하는 듯 우람하고 당당하다. 안내판을 보니 수령이 400년이다. 대략 꼽아봐도 조선 인조 무렵이다. 잠시 훑어보았지만 성벽의 복원 상태가 매우 훌륭하다. 인근 마을 주민들이 설치한 벤치와 성안 곳곳에서 심은 매실나무도 눈길을 끌었다.
문화재를 가꾸는 사람들의 정성이 느껴져 마음이 흐뭇하다. 성벽 위로 낸 호젓한 산책로에서 부부로 보이는 서너 쌍을 만났다. 그 사이 먹구름이 걷혔다. 시내가 한 눈에 들어온다.
■ 백제 한강 이북 방어 위해 축조
반월성의 남쪽은 아직 복원이 덜 되었지만 동쪽부터 서쪽까지는 복원이 마무리됐다. 동문은 사다리가 있어야 오를 수 있는 현문(懸門)인데 성문에 문루의 흔적이 남아 있다. 동문 뒷면에 있는 건물터는 성내의 주요 시설물이 들어서 있었던 곳으로 짐작되는 곳이다. 청성산의 정상부에는 장수가 군사들을 지휘하던 장대터도 있다.
지난 1994년부터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를 진행해 치성 4곳, 장대와 망대터 2곳, 건물터와 우물터 등이 확인됐다. 특히 ‘마홀수해공구단(馬忽受解空口單)’이라고 새겨진 기와가 출토되어 <삼국사기>에 기록된 고구려의 ‘마홀군’이 포천이라는 사실이 확인됐다.
지난 2001년에 이루어진 6차 발굴조사 때는 백제와 신라 토기가 대량 출토됐다. 백제가 먼저 축성해 4세기 후반까지 사용했으나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남진정책으로 고구려의 영토가 됐다. 진흥왕이 재위할 때 신라가 한강유역을 장악하면서 반월성은 신라의 북진정책의 전초기지로 활용됐다.
629년 마침내 신라는 고구려 낭비성으로 추정되는 반월성을 차지하면서 한강 이북 지역을 확보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이때 신라는 한강 이북을 방어하기 위해 백제가 축조했던 산성을 크게 정비했다. 물론 반월성의 대대적인 정비도 이때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 고려시대 민간 신앙의 공간
반월성은 8세기 중엽 이후에도 두 차례 정도의 정비가 이뤄졌다. 이 시기의 반월성은 북방을 방어하는 전략 기지로서의 기능보다는 행정 치소로서 활용됐다.
그러다가 나말 여초에 반월성의 전략적 가치가 다시 주목을 받게 되었다. 지방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 신라 조정에 대항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포천 지역은 궁예가 철원을 중심으로 태봉을 세우면서 궁예의 지배를 받게 됐다. 포천에는 궁예와 왕건에 관한 전설을 간직한 유적이 많이 있다.
고려가 개성을 도읍으로 삼으면서 내륙의 반월성은 전략적 가치를 상실하게 됐다. 고려 시대에는 반월성에 대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데, 아마도 방어시설로서의 기능이 크게 줄어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학계에서는 이 무렵의 반월성은 민간 신앙의 공간으로 활용됐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다.
조선 초기에 포천은 한양에서 북방으로 가는 주요한 교통로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에 만주족이 세운 후금의 침략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반월성은 군사 요충지로서 다시 주목됐다. 1618년 광해군은 포천과 영평을 합하여 도호부를 설치하고 감영을 두었다.
이때 판관 이성구가 반월성을 개축하고 중군(中軍)을 주둔시켰다. 그만큼 지리적, 전술적으로 중요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광해군을 내쫓고 인조를 옹립한 1623년에 중군을 혁파하면서 반월성은 산성으로의 기능을 거의 잃게 됐다. 채 10년도 되지 않아 서인 정부의 정책적 판단이 잘못됐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반월성에 관한 기록은 조선 후기에 편찬된 여러 서책에서 찾을 수 있다. 이 가운데 <대동지지>는 다른 책들보다 내용이 충실하다.
“성지(城池)가 현의 북쪽 1리에 있고 성산은 사방으로 갈라지고 가파르며 옛 성이 있으며 둘레가 1천930척인데 우물이 두 곳 있다. 광해군 10년(1618) 영평에 감영을 두고 이 성을 수축했으며 중군을 설치했다가 인조 원년(1623)에 혁파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밖에 <연려실기술>, <포천군읍지>, <견성지(堅城誌)>에도 관련 기록이 있다. <견성지>에는 “고성(古城)이 관아 뒤의 반월산에 있는데 둘레가 1천937척이며 언제 처음 축성하였는지 알 수 없다.
사방으로 갈라져 있으며 가파른데, 1천여 명을 충분히 수용할 정도이다”라고 기록돼 있다. 반월성은 둘레가 1천80m이며 동서 490m, 남북 150m로 삼국시대 산성중에서 규모가 큰 산성이다. 성벽은 반월산 정상부 능선을 감싸고 축조되었다.
북쪽은 돌출되고 남쪽은 오므라들어서 반달(초승달) 모양을 이루고 있다. 성벽의 고도는 북벽이 높고 남벽이 낮다. 성 내부 평탄한 땅은 북벽 중앙의 장대터를 중심으로 동서남 방향의 계단식으로 형성돼 있다. 평탄한 땅에 기와나 토기 조각이 흩어져 있는 것으로 미루어 건물이 있었던 것을 추정할 수 있다.
현재 성의 옛 자취를 엿볼 수 있는 시설물로는 남쪽과 북쪽의 문터, 성벽 바깥쪽에 사각형 모양으로 덧붙여 만든 치성 4개소, 건물터 6곳, 배수시설이었던 수구, 장수의 지휘대였던 장대, 적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세웠던 망대, 우물터 등이 있다. 반월산성 내에서는 모두 6개소의 건물터가 조사되었으며, 장대지는 성의 서편과 북쪽의 2개소에서 확인되었다.
서쪽의 장대지는 성내에서 가장 넓은 평탄한 대지를 형성한 서편 돌출형 대지의 중심부에 원형에 가까운 평탄면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 이곳에서 군사훈련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북쪽의 장대지는 성내에서 가장 높은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반월성에는 성을 빠르게 돌아볼 수 있는 둘레길이라 할 회곽도(廻郭道)가 있었던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북벽의 일부 구간에는 길이 14m, 너비 1m 가량의 깨진 돌조각을 바닥에 깔아 놓은 유구가 확인됐다.
■ 신라의 북진정책의 전초기지로 활용
반월성에서 찾아낸 신라 토기는 6세기 중엽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이것은 신라가 한강 유역을 점유하는 553년(진흥왕 14)의 역사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 토기들의 등장은 포천이 신라의 영향권에 들어가면서 사회문화적 파급이 이루어지는 시기로 볼 수 있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유물로 1단 투창고배와 단각고배가 있다. 6세기 중엽에 출현한 굽다리가 급격하게 낮아진 단각고배는 신라의 전기와 후기를 나누는 기준으로 제시되고 있다.
양주 대모산성, 서울 아차산성, 하남 이성산성, 이천 설봉산성과 설성산성에서도 단각고배와 1단 투창고배 양식이 나타난다. 7세기 후반에 해당하는 유물은 물론 8세기 후반부터 10세기 초반에 해당하는 유물도 많은 편이다. 통일신라시대로 추정되는 기와나 토기 이외에도 벼루나 인장 같은 석제 유물이 출토됐다. 이러한 유물을 통해 신라의 지배세력과 반월산성의 지위를 살펴 볼 수 있다.
정리해 보면, 반월산성은 백제가 축조하여 4세기 후반까지 고구려 방어요새로 사용되다가, 광개토대왕 대에 고구려 영토로 편입되면서 고구려 건축물이 세워졌고 이 과정에서 마홀군이 명시된 기와가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진흥왕 이후 신라가 한강유역을 장악하면서 반월산성이 신라의 북방진출에 중요한 전진기지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에는 반월성의 활용도가 삼국시대에 비해 낮았다. 도성 개경과 한참 떨어진 포천 일대의 전략적 중요성은 이전에 비해 크게 줄어들었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반월성은 민간신앙이 행해지던 곳으로 추정되고 있다. 특히 애기당에서 발견된 유구와 유물은 고려시대 이전부터 이곳에서 제사가 이루어진 것을 보여주고 있다.
반월성은 전망도 좋고 복원도 잘 된 사적이다. 다만 한 가지 못내 아쉬운 것은 스토리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1천700년의 오랜 역사를 간직한 반월성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을 것인가.
백제와 고구려와 신라, 그리고 후삼국을 거쳐 고려와 조선으로 이어지는 오랜 역사에서 반월성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전설이나 설화를 곁들이면 어떨까. 비단 반월성만이 아니다. 해당 지역의 관계자들이 나서서 산성에 이야기를 입히는 정성을 쏟는다면 산성은 우리와 더욱 가까워 질 것이다.
김영호 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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