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때문에 경기도는 경기라는 지명을 사용하기 전(고려 현종 9년(1018년)) 부터 한반도 문명의 중심에 있었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실학의 본산으로 과학문명 발전을 주도하기도 했으며, 향후 대한민국 미래 문명 발전에도 경기도의 역할이 클 것으로 전문가들은 전망한다.
경기천년의 역사적 전통과 문명 전환기에 경기도의 역할에 대해 살펴본다. 편집자 주
경기도의 선사시대(先史時代) 이한용 전곡선사박물관장
“도내 선사유적 발굴·보존, 문화관광벨트로 적극 활용”
연천 전곡리의 구석기시대 유적지와 하남 미사동의 신석기시대 유적 그리고 여주 흔암리의 청동기시대 유적 등이 대표적이다.
구석기시대에는 빙하기의 영향으로 지금의 경기만 일대가 대륙과 연결된 육지였으며 육로를 통한 활발한 이동과 교류가 이루어졌다. 이미 수십만 년 전 구석기시대 이른시기부터 경기도 일대에는 고인류의 거주가 활발하였다.
전기구석기시대의 연천 전곡리유적과 후기구석기시대의 남양주 호평동유적이 대표적이다. 경기도의 구석기시대 유적들은 우리나라의 구석기문화의 시작과 한국인의 기원에 관한 연구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
구석기시대가 끝나갈 무렵 기온이 서서히 올라가면서 오늘날과 같은 기후 환경이 만들어진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인류는 구석기시대를 마감하고 신석기시대를 맞이하였다. 바닷물이 높아지면서 대륙과 분리된 지금의 경기만 일대는 바닷길을 통해서 중국은 물론 동남아시아의 문화가 한반도로 드나드는 통로 역할을 하였다.
시흥 오이도유적, 시흥 능곡동유적, 안산 신길동유적 등은 경기도 서해안 지역 신석기시대 사람들의 생활상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경기도의 신석기시대에서 또 한가지 주목되는 것은 벼농사의 기원과 관련된 유적들이다. 김포의 가현리 일대의 토탄층에서 발견된 탄화미와 일산 가와지유적 1지구에서 출토된 볍씨들은 연대측정결과 신석기시대의 볍씨로 알려졌다.
이처럼 경기도에서 발견되는 볍씨 관련 자료들은 적어도 신석기시대 후기에 벼가 해류를 따라 서해를 건너 한강 하류인 김포(일산)지역으로 유입되었을 가능성을 크게 시사해 준다고 하겠다. 벼농사가 본격적으로 도입된 것은 청동기시대로 생각되지만 이미 경기도지역의 신석기유적들에서 벼농사와 관련된 자료들이 출토되고 있다.
청동기시대에 접어들면서 삶의 방식이 다원화되고 문화는 복합적으로 발달하여 이전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사회가 변하게 된다. 경기도의 청동기시대에서 가장 주목되는 사실은 작물재배가 본격화되어 농업경제가 완전히 정착단계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유적이 다수 존재한다는 점이다.
여주 흔암리에서는 쌀·보리·수수·조 등 여러 가지 곡식이 발견되어 청동기시대 전기에 이미 한강유역에서 쌀이 본격적으로 재배되었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려주었다. 신석기시대 볍씨의 존재가 알려진 김포 가현리와 일산 가와지유적의 존재를 상기해 볼 때 경기도지방은 한반도의 농경 도입과 발전에 가장 선도적인 역할을 한 지역으로 볼 수 있다.
이렇듯 경기도의 선사시대에 관한 많은 정보를 전달해 주는 선사유적의 대부분은 땅에 묻혀 있어 그 중요성을 설명하기도 이해하기도 쉽지 않다. 눈에 안 띄기 때문에 각종 개발사업의 과정에서 훼손되는 경우도 많다.
따라서 선사유적의 보존과 활용을 위해서는 차별화된 전략이 필요하다. 경기도의 선사시대유적들은 지역문화자원, 지속 가능한 문화관광자원 그리고 조화로운 개발사업을 유도하는 문화벨트로 활용할 훌륭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더욱 적극적인 활용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조선시대 과학문화와 경기도 정성희 실학박물관 책임학예사
“실학자들 서양문물 수용… 조선 과학기술 발전 주도”
이처럼 오늘날 과학이라는 개념은 서양 과학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전통과학을 서양과학의 개념으로 재단할 수는 없다. 전통과학의 개념 논의를 위해 사회적 전통 속에서 형성된 한국의 전통과학의 특징을 발견하는 것이 근대과학에 역행한, 혹은 과학이 덜 발달되었다는 개념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한다.
한반도에서 중심지 역할을 수행해 온 경기도는 풍부한 문화유산이 상당히 많이 남아 있는 지역이다. 세종대 과학문화를 이끈 세종의 능이 여주에 있고 세종과 함께 천문학 발전을 이끈 이순지(李純之, 1406∼1465)의 묘가 남양주에 위치해 있다.
출범한지 몇 십 년 밖에 안된 조선왕조는 유교적 이념에 맞게 왕실의 권위를 확고히 하기 위해 천문역법의 정비가 절실했다. 삼국시대부터 우리나라는 중국의 역법을 빌려다가 쓰고 있었는데 고려 이후부터 그것을 수도를 기준으로 약간 수정해서 사용했다.
근본적으로 우리나라 기준의 천체 운동 계산은 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보면 된다. 세종은 조선에 맞는 역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을 맡은 인물이 바로 이순지다.
세종대로 대표되는 조선전기의 과학기술의 성과는 임란과 호란이라는 대규모 전란으로 인해 회복하기 어려울 만큼 위축되어 자주적인 과학기술 전통이 무너지고 말았다. 이렇게 열악했던 조선의 과학기술은 영정시대에 이르러 재정비되었으나, 이미 조선의 과학기술은 청나라를 통해 들어온 서양과학의 영향에 압도되었다.
조선이 서양의 앞선 과학기술을 처음 접촉하기 시작한 것은 중국에서 활약하고 있던 서양선교사들의 책과 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서양과학기술을 가장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부류는 조선후기의 실학자들이었다. 실학자들에게 본격적으로 나라의 부강을 위해 서양의 과학기술을 배우자는 의식이 일어난 것은 18세기 말부터였다. 그들은 우리의 본질적인 것을 지키기 위해 서양의 기술을 배우고자 하였던 것이다.
경기도는 경기실학이라 불릴 정도로 많은 실학자를 배출시킨 지역이다. 경기도 지역에 실학자들이 많았다는 것은 그만큼 시대의 흐름을 제대로 읽을 수 있는 문화적 개방성과 함께 수도 서울과 인접한 지리적 요인도 상당히 작용했으리라 생각한다.
실학의 비조로 경기도 안산에서 학문 활동을 했던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을 비롯하여 조선후기 북학사상의 중심지였던 양주 석실서원(石室書院) 출신의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 1731~1783)과 이재(齋) 황윤석(黃胤錫, 1729~1791)은 조선후기 천문학 발전에 큰 업적을 남긴 분들이다.
홍대용과 홍윤석이 몸담았던 석실서원은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도덕과 충절을 기리기 위해 효종 7년(1656)에 창건된 경기지역의 대표적인 서원이다.
김상헌이 만년에 우거하였던 양주 석실촌에 자리잡은 이 서원은 조선후기 정치·사회 변동 하에 노론계(老論系)의 주요한 기반이자 호락논쟁(湖洛論爭)의 진원지로 그 역할을 수행하였다.
아울러 가평의 병여(炳如) 김석문(金錫文, 1658~1735)도 석실서원과 관련있는 인물로 지구자전설과 우주관 등 조선후기 천문학을 언급할 때 빠질 수 없는 인물이다.
조선시대 새로운 길을 찾은 실학 조준호 실학박물관 학예기획부장
“실학개념 논쟁 벗어나 경세학 연구로 학문적 저변 넓혀야”
이처럼 근대성에 기준한 실학 개념의 논쟁에서 벗어나 경기지역을 중심으로 진행된 현실 대응과 그 실천으로 경세학의 내용에 대한 관심은 경기 실학의 학문적 저변을 넓히는 작업이라 생각한다.
(1) 여말선초 신 왕조 개창과 체제 정비의 과정에서 조선 왕정국가의 설계자였던 정도전(鄭道傳)의 학풍은 조선초기 체제 정립과정에서 중앙집권 관료국가의 확립에 기반을 마련하였다.
(2) 16세기 사림파의 등장과 경세론에서 주목되는 인물은 이이(李珥)였다. 그는 새롭게 집권한 사림파의 국가 경영을 위한 방책을 제시하며 200여년간 조선 국가 운영과정에서 노정된 적폐를 개혁하고자 하였다.
(3) 전란이후 국가의 재건과정에서 김육(金堉)은 개방적인 자세로 시무에 유용한 사상을 흡수하였다. 그는 공평과 효율을 함께 실현한 대동법을 완성하여 전국적 시행의 기틀을 마련했다. 또한 그가 추진한 동전 유통책은 이후 동전 통용에 이바지하였다.
(4) 국정을 주도했던 대신들의 경세학은 김육 이후 더 높은 차원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반면 그런 지위에 오르지 못한 학자들은 경세의 학풍을 더욱 발전시켰다. 유형원(柳馨遠)의 <반계수록>의 국가개혁론, 이익(李瀷)의 안민부국론, 그리고 정약용(丁若鏞)이 편찬한 <경세유표>에 제시한 국가 제도론의 심화가 대표적이다.
이처럼 정도전에서 비롯하여 이이, 김육, 유형원, 이익, 정약용 등으로 계승해 왔던 경세학은 19세기 파행적인 세도정치기하에 좌절되고 만다. 하지만 그 학문적 전통은 문호개방이후 근대국가로 발돋움하기 기반을 제공하였다.
20, 21세기 문명의 전환과 디지털 혁명 허동현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다양한 지식정보 자원 보유, 디지털 혁명 이끌 중심축”
중국은 멸시의 대상이 되었고 문명으로서의 유교는 폐기되었다. 산업혁명과 인권세우기로 상징되는 근대로의 문명 전환을 이끌 주체는 누구였을까? 영국과 프랑스는 상공업자였고 독일이나 일본은 왕이나 무사였다.
그러나 우리의 왕실·양반(개화파)·농민(민중)·상공업자 중 누구도 근대의 문을 열지 못해 문화적 열등자로 낮춰 보던 일본에 의한 타율적 문명전환 식민 지배를 당하는 아픔을 겪었다. 해방 이후 허송한 근대의 시간을 따라잡기 위해 우리는 “바쁘다 바빠”와 “빨리 빨리”를 입에 달고 시간의 압축을 통해 산업화와 민주화에 성공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의 시대적 소명은 민족을 단위로 한 통일된 국민국가 세우기라는 미완의 근대과제와 디지털혁명이란 근대 이후 과제 둘로 요약된다. 분단의 최전선이자 수도 서울보다 더 많은 지식정보 자원을 보유한 경기도는 남북통일은 물론 디지털 혁명을 이끌 중심축이다. 지식정보화 시대의 진전 속도는 숨 가쁘다. 산업화 시대를 이끈 제철소와 정유·화학공장의 굴뚝은 더 이상 발전의 상징이 아니다.
인공지능(AI)·사물인터넷·빅데이터 등 새로운 기술에 힘입어 디지털 혁명이 눈앞에 다가왔다. 지식정보화 시대를 견인한 반도체 기술의 메카인 수원은 물론 광교 테크노밸리와 안산 사이언스밸리, IT 융합클러스터가 들어선 성남과 용인 그리고 판교 자율주행자동차 도시 조성 등 경기도는 디지털 혁명을 견인하는 기관차다.
앞선 산업화·민주화 시대에는 이를 추동한 파워 엘리트들의 리더십이 중요했다면, 디지털혁명을 이룩해야 할 오늘은 지식과 정보력을 갖춘 시민사회의 팔로워십(followership)이 시대를 이끄는 진정한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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