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석 칼럼] 영재가 영재인가

우리나라의 많은 부모나 젊은 인재들이 옛날부터 지금까지 아직도 집착하는 길이 있다. 고시다. 대개는 시험에 최적화된 영재들이 도전하는 길이다. 한 번 붙기만 하면 평생 권력을 누릴 수 있다. 대부분은 부도 쌓는다. 부와 명예와 권력을 모두 누릴 수 있는 길이기 때문에 성적 좀 좋다는 젊은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여기에 매달린다.

 

20살에 사법고시에 합격한 젊은이가 있었다. 사법고시 최연소 합격자다. 벽촌 시골 출신에다가 최연소 사법고시 합격생이니 세상이 모두 칭송할 만하다. 약관의 나이부터 ‘영감’ 대접을 받았다. 아이 키우는 많은 부모들이 꿈꾸는 그대로 승승장구하였고, 최근에는 대통령을 보좌하는 핵심 요직을 맡았다. 이 정도면 우리나라의 대부분 부모들이 제일 갖고 싶은 자식이 아닐까?

 

그러나 이 사람이 근무시간에 처가 부동산 거래를 하는 곳에 나타나는가 하면, 처가 농지 매입 건과 관련되어 논란을 빚고, 수상한 가족 회사의 세금 축소 의혹까지 받는 등, 수준 높은 인재의 품격은 사라지고 없다. 

더 심한 것은 대통령 옆에서 핵심적인 보좌를 해야 하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무당 끼 있는 아낙이 대통령을 조정하여 국사를 주무르는 데도 아무런 긍정적 역할을 하지 못했다. 더 나아가서 오히려 그 아낙의 그늘을 이고 산 것 같다. 자존감이나 자부심이나 사명감이나 자긍심 같은 것은 찾아볼 수도 없게 허물어진 대한민국 최고 영재의 모습이다.

 

다른 부문에서 대통령을 보좌하는 어떤 수석은 미국 유명 대학의 경제학 박사다. 대학 교수도 지냈을 뿐 아니라, 경실련의 한 위원회 위원장도 맡은 적이 있다. 이 정도면 세상의 많은 부모들이 자기 자식에게 저런 사람처럼 되어보라고 말할 만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 사람도 역시 그 아낙의 기획에 따라 기업을 돌아다니며 거금을 갈취하고, 해외 출장을 다녀왔다. 이 정도면 그 아낙의 집사 격에 불과하다. 대포폰을 사용하여 회유도 하고 증거를 없애려 허둥댔다. 여기 어디에서 영재의 품격이나 고고함을 발견할 수 있겠나.

 

우리의 영재들은 왜 고작 이 모양인가.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이렇게 길러졌기 때문이다. 주위에서도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다. 시험만 닥치면 해야 하는 어떤 일에서도 면제된다. 우선 성적만 좋으면 된다. ‘사람’으로서 교육되지 못하고, 시험 기계로만 길러진다.

‘본질’과 ‘기능’ 사이에서 우선 ‘기능’만 다듬고 서두르다가 자초한 일들이다. 고등학생들에게는 우선 대학만 합격하면 된다고 가르치지 않았는가. 젊은이들에게 예의를 가르치지도 않았다. 삶의 진정한 가치에 대해서도 가르치지 않았다. 

왜 사람은 공동체와 함께 해야 하는지도 가르치지 않았다. 친절이나 착함이 어떻게 사람을 위대하게 하는지도 가르치지 않았다. 이렇게 길러진 인재는 사실 ‘사람’이라기보다는 ‘기계’에 가깝다. 부과되는 기능만 잘 수행하면 스스로도 만족하고 사회적으로도 인정받는 기계 말이다. 여기에 삶의 품격이니 자아의 완성이니 하는 것들은 말을 꺼내기도 낯 부끄럽다.

 

‘사람’이라면 ‘기능’을 제어하는 더 근본적인 능력, 즉 ‘덕’을 갖고 있어야 한다. 이 ‘덕’은 지식보다도 심부름이나 노동이나 여행이나 방황이나 지루함이나 실패의 경험이나 봉사나 자발적 독서 등에서 길러진다. 문제는 우리가 미래를 책임질 인재를 이렇게 기르지 않는다는 점이다. ‘덕’의 존재로 키우지 않고, ‘기능’적 기계로 길러온 것은 아닌지 심각하게 반성해야 한다.

기계는 행복도 모르고, 희생도 모르고, 헌신도 모른다. 자존심도 없고 자부심도 없다. 품격이나 기품에 가치를 둘 줄 모른다. 기능적 교육의 징벌적인 업보가 지금 진행되고 있다. 우선 각자 자기 자식을 어떻게 기르고 있는지부터 돌아보면 좋겠다.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교수·건명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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