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지켜낸 경기도 산성을 가다] 36. 수원고읍성

흥망성쇠 역사 품은… 武鄕의 성지를 거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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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융건릉
수원고읍성(水原古邑城)을 아는가. 

놀랍게도 수원고읍성은 사도세자와 정조가 잠들어 있는 화산 융건릉 주변이다. 사실 ‘수원고읍성’이란 용어는 최근에 생겨난 것이다. 수원읍성이란 이름 사이에 ‘고(古)’라는 글자를 덧붙인 것은 현재 통용되는 행정구역상의 명칭과 구분하기 위함이다. 

“화성시에 화성이 없고 수원시에 수원이 없다”는 말에서 짐작하겠지만, 1949년 8월 행정구역 명칭을 제정할 때 당시 담당자들이 수원이 돼야 할 곳을 화성이라 하고 화성이라 불러야 할 곳을 수원이라 이름 붙이는 어처구니없는 잘못을 저질렀다. 

조금만 깊이 생각했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것이 혼란을 준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고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제는 이 터무니없는 사실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는 형편이다.

수원고읍성의 흔적은 희미하지만 그 역사는 오래됐다. 수원이라는 고을 이름을 갖게 된 것은 1271년(고려 원종12년)이다.

1789년 정조가 팔달산 자락으로 수원읍치를 옮기기 전인 220년 전만해도 융릉과 건릉이 자리한 화산이 수원고읍성의 중심이었다. 

수원에 관한 최초의 종합보고서라 할 <세종실록지리지> ‘수원도호부’를 보면 “본래 수원은 고구려의 매홀군인데 △신라가 수성군으로 고쳤으며 △고려 태조가 수주(水州)로 승격시켰으며 △태종 13년 계사(1413)에 수원도호부가 됐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일찍부터 이곳이 전략적 요충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강유역을 백제가 가장 먼저 차지했던 역사를 미루어보면 수원은 백제의 영토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따라서 수원읍성의 축성된 시기도 백제 초기(온조왕 11년 7월)에 독산책(독산성)을 설치했던 무렵으로 짐작된다.

 

<지리지>에서 주목할 것은 “읍토성(邑土城) 둘레가 270보요, 안에 우물 두 개가 있다”라는 기록이다. 읍성의 규모치고는 너무나 작다. 그런데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대동지지> 모두 “읍성은 토축이며 둘레가 4천035척이나 지금은 모두 무너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결국 <지리지>의 기록이 잘못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다. 판각하는 과정에서 실수로 글자를 하나 빠트렸을 가능성이 크다.

 

수원고읍성의 역사적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주변 지리를 세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꼽을 점은 수원고읍성이 독산성과 서로 ‘기각지세(角之勢)’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수원이 중국과 직접 문물을 교류할 수 있는 길목에 위치하기 때문에 삼국시대부터 수원고읍성을 차지하려는 치열한 투쟁이 벌어졌을 것이다. 

따라서 독산성을 비롯해 주변에 있는 수기리성, 요리성, 당성을 연결해서 살펴보아야 한다. 수원은 고려시대에 4개 역(驛)이 설치되었을 정도로 교통의 요지였으며, 염불산 해운산 흥천산으로 연결되는 봉수, 즉 통신망도 갖추고 있었던 곳이다. 그럼에도 조선시대에는 수원이 전략상으로 특별한 주목을 받지 못했다.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수원은 강무하고 매사냥을 하기 좋은 장소였다. 예컨대 세종이 왕세자와 종친을 거느리고 수원에서 강무(講武)를 벌였던 것을 비롯해 매사냥을 했던 사실도 여러 차례 실려 있다. 책만 보았던 학자 세종이 아니라 수원 들판에서 군대를 사열하고 말을 달리며 멧돼지를 사냥했던 문무겸전의 세종을 여기서 확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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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산성으로 불리기도 하는 수원고읍성의 북면부분. 토성이라 자세히 봐야 구분할 수 있다.
수원이 조선의 역사에 새로운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은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이다. <선조실록>을 보면 1593년 겨울, 왕세자(광해군)가 저녁에 수원부에서 머물렀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후 수원을 거론할 때면 “수원은 경기의 큰 고을로 양호(兩湖)의 요충지이자 서울의 보장지”라거나 “실로 우리나라의 정예로운 군병이 있는 곳”이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임진왜란의 전개과정을 기록한 <난중잡록> 1592년 7월에 “지난달 23일에 의병장을 따라 수원산성에 이르러 5일간을 머물렀다”고 했고 10월에는 “전라감사 권율이 수원 독성에 있으면서”라는 구절이 보인다. 이러한 기록을 통해 수원고읍성은 독산성과 더불어 임진왜란 때 중요하게 활용됐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수원산성(水原山城)’이라는 원문이 네 차례 나온다.

 

수원부의 독산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는 경우도 있지만, 수원산성으로 표현된 고읍성이 존재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임진왜란 이후 수원고읍성에서 십리 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한 독산성은 더욱 주목되는 군사요새로 발전됐다. 

1610년 1월, 비변사가 “경기 지방의 산성이 무려 열일곱 곳이나 되는데 적이 물러간 뒤로 점점 폐지되고 오직 수원의 독성만이 꾸준히 수리되어 왔습니다”라고 보고하고 있다. 광해군은 왕세자 시절부터 수원의 지리적 여건과 상무적 풍토를 주목했다.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종묘나 성균관에 거둥할 때 수원에서 병사를 뽑아 호위를 맡겼을 정도로 의지했다. 덕분에 수원은 무향으로 발전했다. 효종은 수원의 군병이 훈련도감보다 많고 실력도 낫다는 신하의 평가를 듣고 “수원은 본디 무향(武鄕)”이라고 하였다. 

<실록>을 보면 이때부터 수원의 군병이 7천 혹은 8천이라는 기록을 찾을 수 있다. 또한 이 무렵 수원고읍성 안에 왕이 거처할 수 있는 별당을 마련했는데, 시설이 확장돼 숙종시대에는 ‘행궁’으로 승격했다. 

이 무렵 행궁을 보호하기 위해서 읍성이 보수됐을 것이다. 숙종이 노량사장에서 군병을 친열하면서 “수원의 군병은 가장 정예하다”라고 했던 칭찬이나 “수원의 7천 병마는 본래 날래고 사납다”라는 대신의 말은 ‘무향’ 수원의 실상을 잘 드러내고 있다.

 

1760년 초가을, 사도세자가 수원고읍성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이때 사도세자는 화산에 올라 효종이 묻히려 했던 곳을 둘러보고 독산성을 방문해 무예를 시험하고 활을 쏘았다. 이러한 사도세자와 수원고읍성의 인연은 아들 정조에게도 이어졌다. 

1789년 초가을, 정조는 양주 배봉산에 있던 부친 사도세자의 묘소를 수원부 강무당이 있던 화산으로 옮기면서 수원읍성에 살던 주민들을 팔달산 아래 유천마을(현재의 세류동)로 이주시켰다. 

관아와 강무당을 비롯하여 수원읍성에 즐비하게 서 있던 건물도 팔달산 아래로 옮겨졌다. 10월6일에 천장을 마치고 정자각에서 하룻밤을 지낸 정조는 다음날 아침 일찍 화산에 올랐다. 산을 내려온 정조가 신하들을 둘러보며 했던 말은 매우 인상적이다.

 

“이 산은 화산이니 꽃을 많이 심으면 좋겠다”

정조는 명에 따라 화산을 비롯하여 화성과 독산성 주위에도 나무를 많이 심고 가꾸었다. 관아와 민가의 이전으로 훤하게 된 빈터에는 소나무와 꽃나무가 자랐다. 

이때 화산과 성황산 자락에 사도세자의 명복을 비는 원찰 용주사를 중창하면서 수원고읍성은 역사의 뒤란으로 묻히게 됐다. 고려시대부터 500년 이상 번영을 누리던 수원고읍성은 순식간에 소나무와 꽃나무로 둘러싸인 한적한 곳이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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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대학교 건너편 도로변에 세워진 수원고읍성 표지석.
현재 수원고읍성은 물론 성벽도 허물어져 원형을 간직한 곳을 찾을 수 없다. 다만 성벽이 서 있던 자리만 몇 군데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거의 잊혔던 수원고읍성 주변이 최근 택지지구로 개발되면서 사람들의 관심을 받게 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 것이다.

 

수원고읍성은 경기도 기념물 제93호로 지정됐다. 그러나 제대로 관리되지는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국립지리원에서 발행한 25,000의 1과 50,000의 1 지도에도 화성군 태안읍 안녕리에 수원고읍성의 일부가 표시돼 있다. 

융건릉매표소 부근을 공사할 때 관청건물지로 보이는 초석들이 발굴됐다. 이를 통해 수원고읍성의 주요 시설물들이 융릉 주변에 서 있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수원대학교 도서관 건물 쪽에도 성터가 남아 있다. 

현지 주민들이 ‘고수문(古守門)’이라 부르는 곳인데 수원고읍성의 서문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지점이다. 성벽의 흔적은 수원대 도서관 건물부터 수기리까지 연결되어 있다. 치리고개에 북문이 있었다고 전해지며 남문터는 융릉 건릉의 건너편 도로변에 남아 있다. 

치리고개에서 화산을 오르면 산허리 중간쯤에 융릉경내를 알리는 입산금지 표식이 있고, 건릉 경내를 표시하는 철조망이 쳐 있는 곳에 성터가 남아 있다. 따라서 수원고읍성은 성황산과 화산을 연결하는 능선과 골짜기를 포함하여 축조된 포곡식의 산성으로 추정된다.

 

수원고읍성을 둘러보며 스스로 다짐했다. “설령 한 줄의 기록이나 한 점의 유물이 남아 있지 않더라도 역사는 엄연히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고. 빈 곳을 역사적 상상력으로 채워내는 작업도 인정하는 풍토라야 우리의 역사가 더욱 건강해질 것이다.

 

김영호 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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