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타깝지만 AI(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 발병 자체는 천재(天災)의 측면이 강하다. 전염의 매개가 철새로 알려졌다. 철새 이동을 통제할 수는 없다. 멀쩡한 철새를 미리 살처분할 수도 없다. 더구나 이번에 발견된 AI는 새로운 변종이라고 한다. 경기도가 관리해오던 AI와 다른 종류다. 가금류 농장 종사자 등을 대상으로 해오던 예방 접종 노력이 모두 무용지물이다. AI 발병과 확산 자체를 두고 방역 행정만 나무랄 수는 없는 이유다.
하지만, 발생 후 대처는 다르다. 분명히 행정력이 책임져야 할 부분이다. 가금류에 대한 살처분은 특히 그렇다. 확산 방지를 위해 행정이 할 수 있는 투박하지만 기본적인 대응요령이다. 경험을 통해 나름의 로드맵도 정리돼 있다. 농림축산식품부가 마련해 놓은 AI 긴급행동지침이다. AI가 발생한 농장에서 사육 중인 동물 및 생산물은 24시간 이내에 살처분하도록 규정돼 있다. 이 지침에 따라 매몰 장소를 정하고, 사체를 묻으면 된다.
그런데 본보 취재진의 확인 결과 이런 기본적 대응이 안 되고 있다. 매몰장비가 부족하고 매몰장소도 찾기 어렵다. 매몰 장비의 핵심은 액비저장고다. 아연과 금철판으로 만든다. 이걸 만드는 데 3~4일 걸린다. 이 작업이 28일에야 시작됐다. 매몰장소는 대량 매립에 따른 침출수 위험 등으로부터 안전한 곳을 택해야 한다. 이런 땅을 찾는데 시간이 허비되고 있다. 매몰은 특수한 작업이다. 이런 업무를 수행해야 할 전문 인력도 없다.
25일 AI가 확인된 이천의 한 농장은 곧바로 4만 마리의 닭을 폐사시켰다. 하지만 현재까지 매몰하지 못하고 있다. 20일 이후 잇따라 AI가 확인된 양주 지역의 사정은 더 심하다. 농장마다 살처분된 가금류 수만 마리가 방치돼 있다. 매몰 계획을 잡지 못해 살처분을 미루는 농가도 있고, 사전에 살처분된 가금류 사체를 쌓아둔 농가도 있다. AI가 처음 발견된 것은 지난달 28일이다. 도대체 한 달 동안 무슨 방역 대책이 있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액비 저장고 제작은 사람이 하는 작업이다. 철제로 만들면 시간도 단축된다. 철판과 철판 사이를 겹치게 하여 아연 용융도금 볼트로 체결하고, 겹치는 철판 사이에는 특수 접착제로 접착하여 높은 기밀성을 갖도록 시공하면 된다. 사전 제작은 불가능했더라도 AI 발견 초기부터 서둘렀으면 혼란을 줄일 수 있었다. 이게 안 돼서 도내 곳곳에 가금류 사체가 널려 있다. 명백한 인재(人災) 아닌가. AI 앞에 발가벗겨진 방역행정의 민낯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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