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 이이는 일찍부터 변방의 군사력을 강화해야 함을 주장했고, 대마도를 군사 기지화하는 등 일본에서조차 그와 같은 신호가 포착됐지만 서자 출신이라는 열등감에 선조는 자신의 왕권 강화에만 전력을 기울였다. 심지어 일본의 정정을 살피고 온 황윤길이 올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침략 조짐 보고를 애써 묵살하고 ‘아무 조짐도 발견할 수 없었다’는 김성일의 안일한 보고를 채택했다. 전쟁 준비 같은 머리 아픈 문제에는 흥미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2년이라는 귀중한 시간이 흘러갔고 마침내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은 터지고 말았다. 왜군이 파죽지세로 서울을 향해 진격해 오는데도 선조 임금은 신립 장군이 충주 탄금대에서 막아 주리라는 생각을 했으나 이 역시 오판이었다. 8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용감히 싸웠으나 무참히 패한 신립장군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 것이다.
이쯤 되면 선조는 반성을 하고 “내가 나라에 죄를 지었다”고 백성들 앞에 사죄를 했어야 했다. 그러나 불과 20일만에 적군이 한양에 다다르자 선조는 4월 29일 한양을 버리고 급하게 피란길에 오른다. 백성들이 분노한 것은 당연하다. 곧이어 경복궁과 창경궁이 불타고 형조에서는 노비 문서를 찾아내 소각하는 일이 벌어졌다.
사실상 4월 30일부터는 임금의 통치권은 마비된 상태. 뿐만 아니라 백성들은 임금의 피란 행렬에 돌을 던지기까지 했으니 그 절망과 배신감을 짐작할 수 있다. 선조 임금은 그 후 임진왜란 기간에 이순신 장군과의 갈등을 계속한다. 이순신을 억울하게 한양으로 압송하였다가 백의종군케한 선조는 원균이 칠천량(지금의 거제도 인근) 해전에서 일본 수군에 대패하는 급박한 사태가 발생하자 다시 삼도수군 통제사로 임명한다.
이런 지경에 이르러서도 선조는 반성할 줄을 몰랐다. 더 나아가 전사에 빛나는 명량해전에서 속시원히 적을 괴멸시킨 보고를 받고도 정1품의 벼슬을 내리지 않고 단순히 ‘사형을 면한다’는 면사첩만 내렸다. 심지어 선조는 이순신 장군의 승전을 보고하는 신하에게 “그만 하라”고 짜증을 내면서 엉뚱하게도 중국 때문에 이긴 것 아니냐고 찬물을 끼얹는다.
전란이 끝나고 공훈을 정하는데도 이순신 장군은 목숨까지 바쳐 나라를 구했음에도 1급이 아닌 3급으로 정해졌다. 이처럼 이순신 장군을 홀대한 것은 백성들의 신망이 뜨겁게 치솟는 이순신이 마음만 먹으면 임금 자리도 빼앗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라고 말하는 학자도 있다. 그만큼 선조는 국가보다 ‘왕권’에만 집착했다는 뜻일 게다.
어쨌든 이렇게 임진왜란은 끝났다. 그렇다고 나라가 망했는가? 아니다. 아니면 나라가 흥했는가? 아니다. 망하지 않고 흥하지도 않은 7년 전쟁. 그러면서 당시 우리 인구 25%에 해당하는 3백만 명의 목숨을 잃었고 참전 군인 7만 명이 전사했으며 국토가 쑥대밭이 되어버린 것이다. 나라가 망한 것 이상으로 참담한 고통을 당한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이 역사의 교훈을 되새겨야 하는 것은 그만큼 국가 지도자의 정신이 국가 운명에 결정적이기 때문이다. 비단 선조만이 아니다. 또 우리나라만이 아니다.
국가가 처한 현실을 똑바로 꿰뚫어보고 사심 없이 몸을 던지는 지도자, 국민 앞에 솔직히 잘못을 반성도 하고 고백할 줄 아는 지도자를 갖는 것은 국가의 행운이며 그런 지도자를 갖지 못하는 것은 국민의 불행임을 이번 최순실 게이트로 빚어진 대한민국의 위기에서 또 한번 깨달아야 한다.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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