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 조선의 재건을 꿈꾸다] 10. 학문과 다른 현실 세태 고민한 지식인, 홍석주

‘책 속에 길이 있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책읽기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으로 고전을 읽으면 옛 사람들의 생각을 읽을 수 있고 거기서 지혜를 찾을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18-19세기는 책읽기가 유행처럼 일어났던 시기였다. 특히 19세기는 독서의 시대였다. 이 시대가 독서의 시대가 된 것은 그만큼 많은 서적이 출간되고 읽혀졌기 때문이다.

 

19세기는 청나라로부터 서양 지식을 소개하는 책들이 무수히 수입된 시기였고, 고증학의 영향으로 고전을 해석하는 책들이 쏟아져 나왔던 때였다.

 

이 시기를 살았던 지식인들은 독서클럽을 만들어 습득한 지식을 교류하면서 고전 읽기와 새로운 지식 사조를 넘나들었다. 고전과 신지식이 함께 숨을 쉬던 시기가 바로 19세기였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녹하지 못하여 현실의 벽 앞에서 많은 지식인들이 좌절하고 절망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19세기 지식인, 홍석주

조선 순조대에 재상까지 지낸 연천(淵泉) 홍석주(洪奭周, 1774~1842)는 당대의 문장가로 이름을 날린 인물이다. 홍석주는 역대 한국의 10대 문장가들의 글을 소개해 놓은 「여한십가문초麗韓十家門鈔」에 글이 실릴 정도로 문장력과 학식이 탁월했다.

 

그의 어머니는 영수합서씨(1753-1823)로 조선시대 여성으로는 드물게 철학과 역사에 통달한 여성 지식인이었다.  「문헌통고(文獻通考)」를 비롯한 제자백가의 글을 통채로 암기할 정도로 기억력과 독서력이 비상한 여성이었다고 전한다. 서씨는 홍석주 외에도 길주, 현주 등 3형제를 훌륭하게 키워낸 어머니로도 유명하다. 

글을 좋아하는 어머니의 영향을 받은 탓인지 홍석주는 어려서 부터 독서광으로 소문이 날 정도로 책읽기를 좋아했다. 여섯 살 때 밤이 되도록 방에 없어서 가족들이 찾아보니, 뒷 뜰 달 아래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는 일화가 전해져올 정도다. 「임하필기(林下筆記)」를 쓴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은 그 글에서 ‘연천은 매일 아침마다 어느 책이든 막론하고 4, 5행을 기준으로 삼아 반드시 다섯 번씩 읽곤 하였다“고 증언하였다.

부모의 영향도 있겠지만 실제로 홍석주 집안은 19세기를 대표하는 경화세족으로 다양한 서적을 수집하고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누구보다 빠르게 섭취한 가문이었다. 책을 좋아한 만큼, 집안에는 국내외 서적으로 가득했다.

삼국지를 읽고 관우를 꾸짖다

어려서부터 홍석주는 병약했다. 단순히 몸만 약한 것이 아니라 의원마저 치료를 포기할 정도로 중병에 걸린 적이 있었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주변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그의 어머니인 영수합서씨는 아주 태연했다고 한다. 서씨가 태연한 이유는 일찍이 태몽에서 ‘좌의정 홍공의 관’이라고 적혀있는 관 뚜껑을 봤기 때문이었다. 영수합서씨의 예언처럼 그는 죽지 않았고, 실제 좌의정 자리까지 올랐다. 

병약한 홍석주였지만, 기개는 남달랐다. 12세가 되던 때인 어느 날 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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