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 혼탁한 세상에 반기… ‘생민정치’ 외치다
강릉 사람인 줄 알았다.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 말이다. 율곡이라는 호가 그가 살던 마을, 곧 경기도 파주의 ‘율곡 마을’을 가리킨다는 사실은 추호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만큼 사람의 소속을 그가 태어난 곳으로 쉽사리 못 박아버리는 우리네 생각습관은 참 질기다. 당연하게도 이이는 율곡 사람이다. 이 곳을 자신의 호로 삼을 만큼 그의 애정은 각별했다. 관직에 있다가 물러나기를 밥 먹듯 할 때도 이이에게 율곡은 언제든 돌아가 생의 쉼표를 찍는 ‘부메랑’ 같은 장소였다. 군주와의 갈등으로 정계에서 은퇴해 처가가 있던 황해도 해주 석담(石潭)에서 살았던 적도 있지만, 그리하여 석담 역시 그의 호 가운데 하나로 이름을 올리는 영광(?)을 얻었지만, 그는 언제나 여전히 ‘율곡’으로 불렸다.
율곡은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다. 열세 살 때인 명종 3년(1548)에 치른 진사시 초시를 시작으로 스물아홉 살 때 치른 문과에 이르기까지 무려 아홉 번의 과거시험에서 모두 다 장원 급제하여 생겨난 별명이다. 이는 우리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로, 요즘 같으면 온갖 언론의 톱뉴스를 장식함은 물론, 기네스북에라도 오를 경이로운 기록이다. 천재적인 그의 머리는 아버지 이원수(李元秀, 1501~1561)가 아니라 어머니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1551)을 닮았다.
율곡에게 신사임당은 어머니이기 이전에 스승이었다. 그래서 「선비행장」(先行狀)을 쓰면서도 율곡은 신사임당에 대해 ‘선비’보다는 ‘자당’(慈堂)이라는 부름말을 사용한다. 선비가 ‘돌아가신 나의 어머니’를 가리키는 사적 칭호라면 자당은 ‘살아계신 남의 어머니’를 부르는 공적 칭호다. 신사임당을 ‘삼종지도’(三從之道)에 충실한 유교적 여성상에 끼워 넣지 않고 독립적인 주체로 나아가 공적인 주체로 자리매김하려는 의도로 읽힌다.
율곡의 「선비행장」에서 신사임당은 경전에 능통하며 글과 글씨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 군자요, 무엇보다도 그림에 조예가 깊은 화가로 묘사된다. 남편에 대해서도 그녀는 ‘옳은 도리’를 가르치는 군자의 입장을 견지한다. 남편이 권력의 부스러기를 탐해 ‘잘 나가는’ 친척 집에 들락거릴 때도 이를 경계시켜 화를 면하게 할 정도였다.
이렇게 올곧은 정치 감각까지 일깨워준 어머니였기에, 그런 어머니를 여읜 율곡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열여섯 살의 율곡은 삼년상을 치른 뒤에 금강산으로 들어간다. 유교의 가르침만으로는 삶의 의미나 목적 따위의 궁극적인 물음이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척불숭유’(斥佛崇儒)를 국시로 삼던 조선 사회에서 그의 입산 경력은 필경 ‘마이너스’가 될 터였다. 당시 불가에 몸담은 승려는 백정이나 광대와 다름없이 ‘천인’ 중 하나로 취급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열아홉 살 율곡에게는 그런 세간의 평가보다도 ‘깨달음’이 우선이었다.
이 고집스런 신념으로 인해 율곡은 생전에는 물론 사후에도 반대파로부터 집요한 공격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이때 불교와 접속한 덕분에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이라고 하는 융합적인 세계관에 도달했으니 그렇게 손해만 본 것도 아니다.
율곡은 퇴계가 주장한 ‘이(理)가 기(氣)보다 앞서 있으며 위에 있다는 학설’(理先氣後論)을 수정해 이와 기의 관계는 ‘서로 떨어질 수도 없고 서로 섞일 수도 없는’(不相離不相雜)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라고 보았다. 이러한 관점은 ‘이통기국론’(理通氣局論)으로도 풀이되는데 ‘이통’이란 모든 만물에 하나의 이가 공통으로 들어있다는 것이고 ‘기국’이란 각각의 물(物)에 내재하는 각기 다른 기가 그 물의 특성을 이룬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그가 제창한 ‘이기일원론’이 그의 정치철학과 만나 어떤 변주곡을 연주하는지 살펴볼 차례다.
율곡이 살던 시대는 조선 중기로 건국 후 200여 년이 흐르는 사이에, 국초의 왕성했던 기운이 쇠하여 각종 사회적 부조리가 난무하던 때였다. 특히 연산조 이래의 폐해가 누적돼 백성들의 고통이 극에 달했다. 조선 경제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토지제도가 문란해져서, 토호들은 공전(公田)을 겸병해 부를 확대한 반면 실경작자인 영세농은 중간지주와의 병작제로 인해 수확의 대부분을 수탈당해야 했다. 여기에 지대(地代)ㆍ입역(立役)ㆍ공물(貢物)ㆍ진상(進上) 등 과중한 의무가 농민들의 숨통을 조이는 한편, 족징(族徵)ㆍ인징(隣徵) 등 연좌제까지 가세해 농촌의 피폐한 현실은 이루 말할 수조차 없었다.
정치적으로는 4대 사화가 발발해 사림들의 입지가 무척이나 축소됐다. 유학자들이 현실정치를 멀리하고 개인적인 수양과 사색 위주의 학문 경향 속으로 도피하게 된 것도 충분히 있음직한 일이다. 경치 좋은 산림에 자리한 서원에 틀어박혀 혼탁한 세상으로부터 자기를 봉쇄한 채 고고히 마음을 닦는 이른바 ‘수신’(修身) 담론이 유행했다.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의 ‘위기지학’(爲己之學)이 이러한 노선을 대변한다.
이에 반기를 든 것이 율곡의 ‘위인지학’(爲人之學)이다. 학문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하는 데 있지, 자기만족적 관념의 유희가 아니라는 뜻이다. 진정한 유학자는 백성과 더불어 태평세상의 꿈을 나누며, 또 그런 세상을 열어가기 위해 분투하는 이다. 그러니 세상 돌아가는 형편에 눈 감지 말고 적극적으로 ‘시무(時務)’에 참여하라는 것이다.
율곡의 ‘위인지학’은 비단 학자에게만 적용되는 덕목이 아니었다. 임금도 ‘수기치인’(修己治人)해야 한다. 뜻을 세워 학문에 힘쓰고 인재를 적절한 자리에 등용하여 바른 정치를 펴서 임금의 어진 손길이 온 백성에게 두루 미치도록 해야 한다. 이른바 왕정체제 아래서 ‘학자-정치가’가 자신의 뜻을 펼치기 위해서는 임금을 설득하는 일이 필수였다. 율곡이 그토록 많은 상소문을 올린 이유도 그 때문이다. 스물아홉 살 때 최종 국가고시인 전시(殿試)에 장원 급제해 본격적으로 현실정치에 참여하기 시작한 이래, 율곡은 언제나 임금에게 충언하는 강직한 신하의 본분을 다했다.
율곡이 현실정치에 주로 참여한 시기는 선조 때였다. 그러니까 성웅(聖雄) 이순신(李舜臣, 1545~1598) 장군이 왜적에 맞서 나라를 지키고 있을 때, 저 홀로 살겠다고 요동으로 도망칠 궁리나 한 못난 임금 때 말이다. 그런 군주의 치세 아래서 ‘인정’(仁政)을 꿈꾼다는 것 자체가 헛된 망상이었을 테다. 아무리 간해도 도무지 듣지 않는 ‘불통’(不通) 임금이 야속해 정치 의지를 접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럼에도 임금이 부르면 끝내 외면하지 못한 것은 순전히 지식인의 책임 때문이었다.
율곡은 민생이 도탄에 빠진 현실을 마음 아파했다. 정치란 많이 가진 이의 것을 쪼개어 적게 가진 이에게 보태주는 분배정의를 구현함으로써 균등의 미학을 추구하는 예술이다. 한데 지금은 정치가 문란해 백성의 삶이 완전히 붕괴했다. 건국 후 많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 누적된 사회적 병폐로 인해 ‘뿌리째 개혁’이 절실했다. 율곡이 보기에 가장 시급한 과제는 무엇보다도 ‘약자를 뜯어먹고 사는 사회구조’를 전면적으로 뜯어고치는 데 있었다. 그는 ‘소나 양 같은’ 백성의 죽음을 차마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정치에 나섰노라고 토로한다.
최근 한 관리가, 그것도 교육부 고위간부가 “민중은 개나 돼지로 보고 먹고 살게만 해주면 된다”는 망언을 해 옷을 벗은 일이 있었다. 민중을 ‘개나 돼지’로 보는 그의 눈과 백성을 ‘소나 양’에 비유한 율곡의 눈을 서로 혼동하면 안 된다. 앞의 눈이 민주 질서에 위배되는 고압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시각이라면 뒤의 눈은 봉건 질서에 균열을 일으키는 ‘연민과 연대’의 시선이기 때문이다.
밖으로 국가 안보가 위협받던 시절, 안으로는 정치인들이 자기 무리의 집단이익을 위해 꼭두각시 군주 뒤에서 붕당정치(朋黨政治)나 일삼고 있을 때 율곡은 기꺼이 백성의 귀와 입이 돼 ‘생민정치’를 펼쳤다. 불온한 시대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하늘의 소리’를 내는 일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백성이 하늘이었던 까닭이다.
2016년은 율곡이 탄생한 지 480년이 되는 해다. 그러나 ‘역사는 진보한다’는 명제가 무색하게 오늘 우리 사회는 그가 몸담았던 사회와 별반 다르지 않다. 온갖 사회적 모순과 적폐로 인해 애꿎은 백성들만 죽어나가는 현실이다. 이 탐욕스런 죽음의 항해를 멈추기 위해서는 율곡의 혜안이 필요하다. 스스로 낮은 곳에 임해 힘없는 약자들과 눈높이를 맞춘 채 이들을 보살피고 사랑하는 일이 ‘항상 시무’임을 온몸으로 보여준 그가 그립다.
구미정 숭실대 초빙교수
<生民>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