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를 빛낸 역사 인물] 우계 성혼(1535~1598)

임진왜란 겪은 조선중기 성리학의 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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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본관은 창녕(昌寗). 자는 호원(浩原). 호는 우계(牛溪). 서울 순화방에서 태어났으며, 경기도 파주 우계에서 거주했다. 

일찍이 이황을 사숙했으나 이이에게 질문하면서 서신을 주고 받았다. 1582년(선조 15)까지 관직 부름에도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이듬해 특지로 통정대부에 가자하여 병조참지, 이조참의에 전직, 은대를 하사받았다.

그의 관계진출은 이이의 권유에 의한 것이었다. 이후 파산(坡山)으로 돌아와 사직소를 올렸으나 겸직만 면하고, 그해 12월에는 경기감사를 통해 내린 식물(食物)을 사급받았다. 그는 이이가 죽은 뒤 서인의 영수 가툰데 중진 지도자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 영의정 유성룡과 함께 명나라의 요청에 따르자고 건의하고, 또 허화완병을 건의한 이정암을 옹호하다가 선조의 미움을 받았다. 

그길로 사직, 연안의 각산(角山)에 우거하다가 1595년에 파산의 고향으로 돌아왔다. 1597년에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윤방ㆍ정사조 등이 예궐할 것을 권했지만, 엄견을 기다리는 처지임을 들어 대죄하고 있었다. 

그가 죽은 뒤 기축옥사와 관련돼 삭탈관직되었다가 1633년 추증됐으며, 문간(文簡)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제향서원으로는 여산의 죽림서원, 창녕의 물계서원, 해주의 소현서원, 함흥의 운전서원, 파주의 파산서원 등이 있다. 파주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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